만유의 주 되신 예수 그리스도로 말미암아 화평의 복음을 전하사 이스라엘 자손들에게 보내신 말씀
곧 요한이 그 세례를 반포한 후에 갈릴리에서 시작하여 온 유대에 두루 전파된 그것을 너희도 알거니와
하나님이 나사렛 예수에게 성령과 능력을 기름 붓듯 하셨으매 그가 두루 다니시며 선한 일을 행하시고 마귀에게 눌린 모든 사람을 고치셨으니 이는 하나님이 함께 하셨음이라
우리는 유대인의 땅과 예루살렘에서 그가 행하신 모든 일에 증인이라 그를 그들이 나무에 달아 죽였으나
하나님이 사흘 만에 다시 살리사 나타내시되
모든 백성에게 하신 것이 아니요 오직 미리 택하신 증인 곧 죽은 자 가운데서 부활하신 후 그를 모시고 음식을 먹은 우리에게 하신 것이라
우리에게 명하사 백성에게 전도하되 하나님이 살아 있는 자와 죽은 자의 재판장으로 정하신 자가 곧 이 사람인 것을 증언하게 하셨고
그에 대하여 모든 선지자도 증언하되 그를 믿는 사람들이 다 그의 이름을 힘입어 죄 사함을 받는다 하였느니라
베드로가 이 말을 할 때에 성령이 말씀 듣는 모든 사람에게 내려오시니
베드로와 함께 온 할례 받은 신자들이 이방인들에게도 성령 부어 주심으로 말미암아 놀라니
이는 방언을 말하며 하나님 높임을 들음이러라
이에 베드로가 이르되 이 사람들이 우리와 같이 성령을 받았으니 누가 능히 물로 세례 베풂을 금하리요 하고
명하여 예수 그리스도의 이름으로 세례를 베풀라 하니라 그들이 베드로에게 며칠 더 머물기를 청하니라
직전 묵상에서 고넬료와 베드로의 환상 에피소드를 통해서 ‘하나님의 갈등(사랑)’에 대하여 묵상을 했습니다. 부정한 짐승인 ‘내’가 어떻게 인자 예수님의 품속에서 공의의 하나님과 사랑의 하나님의 갈등 속에서 구원을 받게 되었는지를 설명하는 것이라고 말씀드렸죠. 그것을 알아듣는 자들에게 오늘은 직접 그 ‘복음’에 대하여 설명을 하는 장면입니다.
대주제로 오늘의 말씀을 여십니다. '만유의 주 되신 예수 그리스도로 말미암아 화평의 복음을 전하사’입니다. 화평은 당연히 ‘나’와 ‘하나님’과의 관계 회복을 말합니다. 예수님의 품속이 아니라면 나와 하나님은 원수입니다. 나는 부정한 짐승일 뿐이죠. 절대 가까이 해서도 안 되고 만져서도 안 되는 부정한 짐승일 뿐입니다.
이런 짐승들이 하나님께 무엇(헌금,봉사)을 드린다고 해도 그것은 전부 다 부정한 것일 뿐입니다. 그러나 정확하게 여기서 선택받은 자와 심판받는 자로 갈리죠. 복음을 알게 되면 이것이 인정되면서 고개를 끄덕 끄덕 하게 됩니다. 그러나 그 반대의 입장에 서 있는 자들, 즉 그동안 신앙이라는 이름으로 노력을 해오던 자들, 몇 천 몇 억씩 헌금을 내던 자들, 평생 목회자로, 장로로, 집사로 노력이라는 행위를 했던 자들은 이 명제에 발끈 합니다. 이 자들을 가장 잘 대표한 자들이 ‘바리새인’이었죠. 그래서 예수님은 그 시대를 골라 오신 것입니다. 그들은 자신의 행위가 부정당하는 것을 싫어합니다. 그래서 그것을 지적하는 예수님을 죽이고 복음을 부인하죠. 그래서 자연스럽게 심판이 되는 것입니다.
하나님과 분리된 우리는 모두 부정한 짐승일 뿐입니다. 그런데 이 짐승의 모든 부정함이 예수님께 전가 되었죠. 이것이 바로 37절 요한이 예수님께 세례를 베푸신 장면입니다. 이렇게 예수님께서는 우리의 모든 죄를 뒤집어 쓰셨지만 38절처럼 ‘하나님의 성령과 능력’이 기름 붓듯 임하셨죠. 그래서 ‘그리스도(구원자)’의 역할을 하시게 됩니다.
‘선한 일을 하시고, 마귀에게 눌린 모든 사람을 고치셨다.’고 표현되어 있죠. ‘선한 일’이 바로 ‘복음’입니다. 즉, 하나님의 일을 말하죠. 여기서도 결국 복음에 눈을 뜬 자들과 그렇지 못한 자들이 나누어져서 해석을 하게 됩니다. 복음에 눈을 뜬 자들은 ‘하나님은 선한 일을 하신다.’라는 명제가 틀렸다는 것을 잘 압니다. 참 명제는 바로 ‘하나님이 하시는 일이 선한 일이다.’라는 것이죠. 그래서 구약에서 보면, 때로는 이방인들의 어린아이까지 다 죽이라고 명령하시는 것도 ‘선한 일’이 됩니다. 이것이 성경에 기록이 되어야 진짜 구원을 받을 사람들이 그 에피소드에서 복음을 알아듣고 구원을 받게 되기 때문입니다.
그러나 유지된 자, 즉 심판받은 자들은 ‘선한 일’의 기준이 ‘인본주의’에 묶여 있습니다. 즉, 옆집 사람에게 떡을 돌리는 것, 지나가는 할머니의 가방을 들어주는 것, 아프리카 아이들에게 매달 3만원씩 보내주는 것을 말합니다. 당연히 인본주의에서는 ‘선한 일’이 맞습니다. 그러나 복음에서 바라보는 이러한 일들의 정확한 규정은 ‘선한 일’이 아니라 ‘선한 역할로 사용될 수는 있는 일’입니다. 즉, 때로는 똑같은 일이 ‘선하지 못한 역할’로 사용될 때도 많습니다. ('선'의 의미가 다르기 때문입니다. )
예를 들어 보죠. 교회에서 어려운 사람들 돕기 위해 헌금과 봉사를 했지만, 그 행위에 자부심과 성취감만 늘어가면서 그 행위에 몰뚜하여 진정한 복음을 볼 수 없는 장님이 되어가는 것은 바로 ‘선한 역할을 맡은 것’이 아니라 ‘검은색 역할을 맡은 것’입니다. 이것을 이해하셔야 합니다. '선'의 정의는 '하나님의 일'입니다. 그리고 하나님의 일이란 바로 복음을 말합니다.
또한 예수님은 ‘마귀에게 눌린 모든 사람을 고치셨다.’고 되어 있죠. 이 마귀의 정체가 바로 ‘인본주의’입니다. 인본주의의 더 정확한 정체는 바로 ‘나’입니다. 복음에 눈을 뜬, 즉 거듭난 자들에게는 이 마귀가 ‘나의 옛자아’라고 할 수 있죠.
39절, 그런 예수님을 결국 ‘내’가 십자가에 달아 죽였죠. 그러나 하나님께서 사흘 만에 다시 살리셨죠. 인자 예수님은 바로 ‘나’라고 했습니다. 즉, 이렇게 복음을 알게 된 나는 인생의 모든 가치를 잃어 버리게 됩니다. 그러나 3일, 즉 복음으로 다시 살게 됩니다. 여기서도 복음에 눈뜬 자들과 심판받는 자들이 갈리게 됩니다.
일반적으로 심판받는 자들의 교회생활 혹은 신앙생활의 특징은 바로, ‘예수를 믿고 이 세상에서 행복하게 잘 살기’에 묶여 있습니다. 완벽하게 예수님의 생애와 반대로 살게 되죠. 그러나 복음에 눈 뜬 자들은 점점 더 이 세상의 가치가 무너집니다. 의미가 없어지죠. 의미가 없는 일은 그 어떤 일도 열심히 할 수가 없습니다. 결국 삶이 힘들어 질 수 밖에 없죠. 그런데 그렇게 마음과 생각의 빈공간(죽음, 상실)에 복음이 채워집니다. 복음으로 부활하죠. 그래서 인생을 복음으로 해석하면서 살게 됩니다. ( 전혀 다름 기쁨으로 살아가는 삶을 살죠. 이것을 거듭난 자. 혹은 새로운 피조물이라고 합니다. )
심지어 복음에 눈을 뜨게 되면, 그동안 즐겨 들었던 재미나고, 논리적이고, 인과율적인 설교들에게서부터 흥미를 잃게 됩니다. 그러나 그러지 마십시오. 그런 설교라도 성령께서 임하시며 그 설교를 ‘재 가공’하여 복음으로 들려주시는 신기한 경험을 하게 됩니다. 그런 설교도 말씀을 사용하기 때문입니다. 특별한 경우가 아니라면 본인이 소속된 교회에서 하나님께서 뭔가 가르치려는 것이 있다고 생각하시고 충실하게 임하시는 것이 좋습니다. ( 물론, 그 가르침이 검은색을 통해 흰색을 설명하시는 경우도 꽤 많습니다. )
그리고 복음을 들을 수 있는 자와 심판받는 자는 태초에 미리 택하셨다는 말씀이 41절에 나와 있죠. 왜 하나님은 구원받는 자를 태초에 미리 선택을 하셨을까요? 이것이 바로 ‘사랑의 가장 중요한 속성’이기 때문입니다. 나의 아내를 90%사랑하고 옆집 아줌마를 10%사랑하는 ‘참 사람의 속성’은 없습니다. 오직 사랑은 내가 한 눈에 ‘아름답다’고 여기는 사람에게 꽂혀 그 사람만을 선택하는 것이죠. 하나님의 사랑도 이러하기에 인간에게 이러한 사랑의 속성을 심어두신 것입니다.
42절 보면, 전도는 ‘우리에게 명하사’로 되어있죠. 이 ‘명하사’의 단어를 주목하셔야 합니다. 대부분의 기독교인이 이것을 ‘내가 명받았다.’고 해석을 하죠. 이것을 ‘사명’이라고 풀죠. 모두 헛다리 집고 있는 것입니다. 인간은 하나님의 사명을 행할 능력이 없습니다. 오직 예수님이 다 이루신 것이죠. 이것을 전할 능력 조차 없습니다. 이것은 오직 성령께서 하시는 일이죠. 그래서 ‘명하사’라는 단어를 기록하신 것입니다.
하나님의 ‘명하사’는 그것을 받고 안 받고의 문제가 아닙니다. 즉, 하나님의 ‘명하사’라는 말은 정확하게 ‘이미 이루어짐’을 뜻하는 말입니다. 즉, 우리의 단어가 아닌 하나님의 단어라는 말입니다. 우리나라는 많은 선교사의 순교로 전도가 된 것이 아닙니다. 더 극단적으로 말씀드리면, 이렇게 순교한 자들이 천국에 와서 하나님 앞에 서면 하나님께서 ‘너희는 왜 그랬니?’라고 물을 수가 있다는 것입니다. 더 극단적으로 말씀드리면 그 자들이 순교를 해서 그것에 감동 받아 전도가 될 수도 있지만 그자들이 우리나라 땅을 강탈하려 들어 왔다가 성경 한권을 땅에 떨어뜨렸는데 그것을 통해 전도가 될 수도 있다는 것입니다. 즉, 우리나라가 온 땅에 전도가 된 이유는 바로 하나님의 ‘명하사’ 때문에 이루어진 것입니다. 즉, 어떤 식으로라도 천지는 하나님의 말씀에 순종하게 되어 있죠. 이것을 인간이 ‘노력(순교)’이라는 숟가락을 얹어서 '인간의 업적'을 만들어 낸 것입니다.
요한계시록에 보면, 24장로가 자신들이 쓴 모든 면류관을 예수님의 발 앞에 모두 받치는 장면이 나오죠. 모든 공로는 오직 예수님께 있다는 표현입니다.
이렇게 베드로의 설교가 끝나자 성령께서 모든 사람에게 내려오셨다고 44절에 나옵니다. 이때 46절 그 증거로 ‘방언’을 말하며 ‘하나님을 높임에 대하여을 이야기하죠. 계속 말씀드리지만 성경이 완성된 지금은 '방언'은 없습니다.
‘방언’은 복음의 속성을 설명하기 위해 성경에 한시적으로 기록된 것입니다. 이 당시 사람들은 당연히 이상한 외국말 방언을 했겠죠. 당연히 성령께서 그렇게 만드셨구요. 그런데 성령께서 그렇게 하신 이유는 바로 ‘성경에 기록하기 위해서’입니다. 그것을 기록해서 그것을 통해 복음의 어떤 속성을 지금 성경을 읽고 있는 우리에게 설명하고자 한 것입니다. 그 속성은 바로 ‘천국 백성만이 천국의 말인 복음을 알아 듣는다.’입니다.
이렇게 복음을 알아듣게 되면 나를 높이려 애썼던 인본주의에서 오직 하나님을 높이려는 신본주의로 바뀌게 되는 것이죠. 즉, 기준이 나에게서 하나님으로 옮겨지는 것을 뜻합니다. 그런데 이것도 잘 생각해야 합니다. 인간은 절대 그럴 수가 없습니다. 오직 예수님만이 이것이 가능합니다. 그래서 우리는 오직 예수님만 소망하게 되는 것이죠. 이 메카니즘을 잘 이해하셔야 합니다.
끝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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