사도행전(완료)

행12:12-17(22.07.28.목)

은혜바라기 2022. 7. 28. 08:07

깨닫고 마가라 하는 요한의 어머니 마리아의 집에 가니 여러 사람이 거기에 모여 기도하고 있더라
베드로가 대문을 두드린대 로데라 하는 여자 아이가 영접하러 나왔다가
베드로의 음성인 줄 알고 기뻐하여 문을 미처 열지 못하고 달려 들어가 말하되 베드로가 대문 밖에 섰더라 하니
그들이 말하되 네가 미쳤다 하나 여자 아이는 힘써 말하되 참말이라 하니 그들이 말하되 그러면 그의 천사라 하더라
베드로가 문 두드리기를 그치지 아니하니 그들이 문을 열어 베드로를 보고 놀라는지라
베드로가 그들에게 손짓하여 조용하게 하고 주께서 자기를 이끌어 옥에서 나오게 하던 일을 말하고 또 야고보와 형제들에게 이 말을 전하라 하고 떠나 다른 곳으로 가니라


 이전 묵상까지는 베드로는 죄인 된 나의 역할을 했죠. 그렇게 인본주의로 표현된 옥에서 벗어나 자유를 찾은 베드로가 오늘 묵상에서는 예수님의 표지판으로 나옵니다. 이렇게 하나의 에피소드에서도 같은 상징이 예수님을 가리키기도 했다가 죄인인 나를 가리키기도 하는 것에 익숙해져야 합니다. 

 “마13:44 천국은 마치 밭에 감추인 보화와 같으니 사람이 이를 발견한 후 숨겨 두고 기뻐하며 돌아가서 자기의 소유를 다 팔아 그 밭을 사느니라 ”

 이 비유의 말씀을 보면, 감추인 보화는 ‘나’이기도 하고 ‘예수님’이기도 합니다. 즉, 예수님이 그분의 신부인 나를 발견해서 자기의 소유를 다 팔아, 즉 십자가에서 죽으심으로 나를 산 것을 가리키기도 하고 내가 인생을 살다가 ‘예수님’을 발견하여 나의 소유를 다 팔아, 즉 인본주의를 버리고 복음을 선택한 것을 가리키기도 하죠. 재미있죠? 이렇게 예수님과 내가 한 몸이라는 것을 인식해야 모든 성경 해석이 가능합니다. ( 결국 성경은 나에게 주시는 하나님의 말씀이지만 내가 할 수가 없어서 예수님께서 '모두 이루신다'는 것이 복음의 골자입니다. )

 여러 사람이 모여 기도하고 있는 곳, 즉 교회(나)에 베드로로 표현된 예수님께서 찾아오셔서 문을 두드리죠. 그런데 베드로를 미리 본 여자아이의 말을 나머지 사람들이 절대 믿지 못하고 ‘네가 미쳤다.’고 합니다. 성령께서는 여기서 매우 중요한 것을 설명하고 있습니다. 전도는 절대 인간이 할 수 없다는 것을 가르치고 있는 것입니다. 여기서 ‘여자아이’는 ‘교회에 소속된 사람’을 뜻합니다. 즉, 사람이 사람에게 복음을 전해도 절대 그 사람은 그것을 ‘미쳤다.’고 할 정도로 믿지 못한다는 것을 가르치고 있는 것입니다. 베드로는 옥에서 나왔죠. 그것은 ‘예수님의 부활’을 의미합니다. 그런데 그것을 믿는 것을 ‘미쳤다.’고 표현이 되어 있습니다. 절대 믿지 않고 있습니다. 

 그런데 이것을 교회(나)가 믿게 되는 과정은 바로 16절 ‘ 베드로가 문 두드리기를 그치지 아니하니’입니다. 즉, 예수님께서 찾아오셔서 우리의 마음의 문을 끝없이 두드리는 상황을 말합니다. 즉, ‘예수님의 찾아오심’이 우리의 구원의 출처가 된 것이죠. 예수님은 언제까지 우리 마음의 문을 두드릴까요? 바로 16절 중반 ‘그들이 문을 열 때 까지’ 입니다. 

 “계3:20 볼지어다 내가 문 밖에 서서 두드리노니 누구든지 내 음성을 듣고 문을 열면 내가 그에게로 들어가 그와 더불어 먹고 그는 나와 더불어 먹으리라 ”

 매우 익숙한 말씀이죠? 이 말씀은 초점은 바로 ‘예수님이 끝까지 문을 두드린다.’입니다. 하지만 인본주의에 묶여 있는 자들의 초점은 바로 ‘내가 문을 연다.’에 있죠. 이것이 기독교에서 가장 유행하는 이단인 ‘알미니안 주의’입니다. 감리교가 이 교리를 가지고 있죠.

 즉, 알미니즘은 하나님이 구원을 하려고 손을 내밀면 인간이 그 손을 잡아야 구원이 성립된다는 원리를 가지고 있죠. 일면 완벽한 논리로 보이는 것이 사실입니다. 그러나 장로교의 원리는 ‘불가항력적 은혜’의 원리를 가지고 있죠. 하나님께서 구원하시기로 마음먹고 은혜를 베풀면 선택받은 인간은 절대 그 은혜를 거부할 수 없다는 원리입니다. 이 원리가 ‘정답’이며 복음의 핵심원리입니다. 사실 기독교 내의 이 싸움은 매우 오랜 기간 해 왔습니다.

 

 그러나 장로교에 있는 많은 신자들도 이 알미니즘에 자주 걸려 넘어지고 감리교에 있는 소수의 신자들도 하나님의 불가항력적인 은혜를 알게 되죠. 결국 복음은 교파와 상관없이 성령께서 선택된 사람에게 전달하는 것이기 때문입니다.

 

 그래서  ' 베드로가 그들에게 손짓하여 조용하게 하고 '라는 구절이 등장하는 것입니다. 즉, 성령은 선택받은 못한 자들이 절대 복음을 알지 못하게 하시죠. 심지어 예수심은 선택받지 못하 자들이 복음을 알게 되는 것이 두렵다고 말씀하시기까지 했습니다. 

 

 "마13:11 대답하여 이르시되 천국의 비밀을 아는 것이 너희에게는 허락되었으나 그들에게는 아니 되었나니"

 

 "마 13:15 이 백성들의 마음이 완악하여져서 그 귀는 듣기에 둔하고 눈은 감았으니 이는 눈으로 보고 귀로 듣고 마음으로 깨달아 돌이켜 내게 고침을 받을까 두려워함이라 하였느니라"


 그래서 오늘의 말씀에도 강조된 문구가 ‘문 두드리기를 그치지 아니하니'입니다. 이후 그들이 문을 열어 베드로를 보고 ‘놀라는지라’라고 표현이 되어 있죠. 복음은 이렇게 인간의 논리로 받아들이기 힘들 만큼 놀라운 일입니다. 

 


 이후 17절에 보면, 베드로가 자기에게 벌어진 일을 말하면서 이것을 다른 형제들에게 전파하라고 합니다. 즉, 이런 식으로 복음이 전파된다는 것을 의미합니다. 

 오늘의 짧은 에피소드에서도 여러 가지 복음의 속성들을 전부 담아내는 것이 너무 신기하지 않습니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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