날이 새매 군인들은 베드로가 어떻게 되었는지 알지 못하여 적지 않게 소동하니
헤롯이 그를 찾아도 보지 못하매 파수꾼들을 심문하고 죽이라 명하니라 헤롯이 유대를 떠나 가이사랴로 내려가서 머무니라
헤롯이 두로와 시돈 사람들을 대단히 노여워하니 그들의 지방이 왕국에서 나는 양식을 먹는 까닭에 한마음으로 그에게 나아와 왕의 침소 맡은 신하 블라스도를 설득하여 화목하기를 청한지라
헤롯이 날을 택하여 왕복을 입고 단상에 앉아 백성에게 연설하니
백성들이 크게 부르되 이것은 신의 소리요 사람의 소리가 아니라 하거늘
헤롯이 영광을 하나님께로 돌리지 아니하므로 주의 사자가 곧 치니 벌레에게 먹혀 죽으니라
오늘의 에피소드는 성경에서 가장 뜬금없고 맥락 없는 이야기입니다. 복음을 설명하는 것 같지도 않고 사도행전 12장의 흐름에도 맞지 않고 전개조차 깔끔하지 않죠. 참 이상한 문맥입니다. 약간 억지스러운 느낌을 지울 수가 없죠?
그런데 성령께서 이렇게 억지스럽게 표현한 것 조차도 그분의 계획 속에 포함된 것임을 알아야 합니다. 그 이유가 뭘까요? 바로 성경은 ‘복음’을 설명하기 위한 말씀이라는 것을 의미합니다. 이렇게 억지스럽게 복음을 설명하므로 인해서 성경은 오직 복음만을 설명하기 위해 존재한다는 것을 강조하고 있는 것입니다.
즉, 어떤 경우에는 매끄럽게, 어떤 경우에는 기적을 통해, 어떤 경우에는 맥락 없고 뜬금없는 문맥을 통해서라도 복음을 설명하는 것이 목적이라는 것을 말씀하고 싶으신 것입니다. 반대로 이야기하면, 성경은 논리 정연한 어떤 역사책과 같이 ‘알찬 교훈’을 남기는 책이 아니라는 것을 말씀하고 있는 것입니다.
그럼 오늘은 이 억지스러운 에피소드를 통해 복음을 묵상해 볼까요?
오늘 말씀에 등장한 헤롯은 무엇을 가리키는 상징일까요? 바로 ‘예수님을 잃어 버린 인간’입니다. 베드로를 지키던 파수꾼도 마찬가지로 ‘예수님을 잃어버린 인간’입니다. 어제 묵상에서 베드로는 예수님의 표지판으로 사용되었습니다. 그래서 오늘은 감옥에서 탈옥하여 없어져 버린 베드로의 상황을 통해 성령께서 복음을 이야기하고 있는 것입니다.
이렇게 예수님을 잃어버린 인간은 ‘적지 않게 소동’하게 됩니다. 즉, 우리가 잘먹고 잘 사는 모든 것도 예수님이 안 계신 세상이라면 하나님은 이러한 세상을 한낱 ‘소동하는 것’으로 보고 계실 뿐이죠.
하나님께서 노아의 방주 때에 인간을 모두 물에 빠뜨려 죽였죠. 그런데 이때 하신 표현이 대단히 이상합니다.
“마24:37-39 노아의 때와 같이 인자의 임함도 그러하리라. 홍수 전에 노아가 방주에 들어가던 날까지 사람들이 먹고 마시고 장가 들고 시집 가고 있으면서 홍수가 나서 그들을 다 멸하기까지 깨닫지 못하였으니 인자의 임함도 이와 같으리라.”
‘먹고, 마시고, 장가들고, 시집가고’ 인본주의에서 보면 이 같은 상황은 절대 ‘죄’가 아닙니다. 그런데 이같은 상황이 멸망의 단초인 것처럼 표현되어 있죠. 오늘의 말씀도 마찬가지입니다. 예수님이 없는 세상은 오직 ‘소동’ 일뿐이라는 것이 하나님의 시각입니다.
이에 헤롯이 '베드로를 잃어버린 ' 파수꾼을 죽이라고 명하죠. 즉, ‘예수님을 잃어버린 사람은 죽는다.’를 가리키는 장면입니다. (나중에 헤롯도 죽습니다.)
20절 헤롯이 ‘두로와 시돈 사람들을 대단히 노여워하니’라고 되어있습니다. 그 이유가 뭘까요? 그 이유는 우리가 알 필요가 없기 때문에 성경에 기록을 하지 않은 것입니다. 성경이 이런 방식으로 기록된 이유는 바로 ‘인과율’의 무시입니다. 인간은 어떻게 해서라도 그 사건의 원인을 알아서 결과를 도출하고 싶어 하죠. 이것을 '개연성(그럴듯함)'이라고 합니다. 즉, 인간은 원인과 결과가 누구나 이해할 만한, 즉 개연성이 있어야만 스토리가 매끄럽게 진행이 된다고 믿죠.
하나님께서는 이 '개연성' 보다는 복음이 우선이기 때문에 성경에 보면 이 개연성이 파괴되는 경우가 많이 나옵니다. 이것이 바로 우리가 성경을 재미있게 읽지 못하는 이유입니다. 하지만 세상 종교는 반대죠.
무당의 예를 들어보죠. 갑자기 자녀가 병에 걸려서 무당을 찾아가면 그 무당은 그 부모와 자녀의 태어난 시간, 띠 등등을 통해 개연성을 만들어 냅니다. 그럴듯한 원인을 자녀의 병과 연결을 시켜주죠. 그것을 믿게 된 사람은 '무당이 원인을 찾았으니 치료도 할 수 있을 것'이라고 믿죠. 혈액형, 요즘 많이 나오는 MBTI 도 다 이런 종류의 일환입니다.
그러나 기독교는 반대입니다. 개연성을 파괴시켜서라도 복음을 가장 우선적으로 가르치죠. 그래서 성경은 곳곳에서 모순이 일어나고, 개연성이 파괴되고, 뜬금없는 맥락이 즐비하고, 알 수 없는 족보들이 끊임없이 나열되죠. 사실 성경에서 나오는 기적도 모두 이 개연성의 파괴라고 볼 수 있죠. 즉, 절대 인본주의 논리로는 읽을 수가 없는 책입니다. 복음의 안경을 끼고 볼 때에만 그 스토리가 복음의 개연성으로 연결이 되죠.
오늘 말씀에 등장한 헤롯의 사건도 그 초점은 바로 ‘헤롯의 죽음’입니다. 그 이유는 바로 ‘잃어버린 예수님’을 설명하는 도구로 사용된 사람이기 때문입니다. 그래서 23절에서 보면, 헤롯이 영광을 하나님께 돌리지 아니하므로 죽죠. ‘영광’의 의미를 잠깐 한번 더 살펴보죠.
하나님이라는 신에게 두 손 들고 지극정성을 표하는 것을 영광이라고 하지 않습니다. 이런 식의 해석이 바로 인본주의 개연성을 갖다 붙인 해석이 됩니다. 즉, 하나님을 인간처럼 생각하고 '나라도 이런 대우를 받으면 좋을 것이다'라고 생각하고 그 행위를 그대로 피드백하는 것이죠.
그러나 '참 영광'의 의미는 하나님께서 복음을 계획하시고 그것을 다 이룬 것을 뜻합니다. 그래서 영광은 오직 하나님 스스로 취하는 것입니다. 즉, 예수님께서 홀로 하나님의 영광을 이룬 것이죠. 우리는 다만 그것을 알게 되는 것뿐입니다. 다시 반복하면, 성부 하나님께서 복음을 계획하시고 성자 하나님(예수)께서 복음을 성취하신 것을 '영광'이라고 합니다. 그리고 성령 하나님께서 그것을 선택된 자들에게 알려주시는 것이죠. 그래서 우리는 하나님께 영광을 돌리는 것이 아니라 우리는 단지 예수님의 영광에 참여된 것뿐입니다.
그래서 23절에서 보면, 헤롯이 영광을 하나님께 표현하지 않아서 죽는 것처럼 보이지만, 이 구절의 속 뜻은 헤롯은 더 이상 복음을 알 수 없는 상태가 된 것을 성령께서 우리에게 알려주시는 것입니다. 그래서 복음을 알 수 없는 상태가 된 자들은 죽게 된다는 것을 가르치는 것이죠. 요약하면, 헤롯이 하나님께 영광을 돌리지 않아서 죽은 것이 아니라 예수님을 잃어버린 헤롯은 하나님께 영광을 돌릴 수 없는 존재가 되었기 때문에 죽은 것입니다.
헤롯의 상태가 어떤 상태인가요? 일단 예수님의 표지판인 베드로를 잃어버린 상태죠. 그리고 오직 인간의 분쟁에 휘말려 있는 상태입니다. (그래서 두로와 시돈이 분쟁이 도구로 사용된 것뿐입니다. ) 결국 ‘먹는 일’ 때문에 두로와 시돈과 헤롯은 화합하죠. 그리고 헤롯은 왕의 자리에 서게 되고 두로와 시돈은 헤롯의 연설을 신의 소리라고 아첨합니다.
이러한 상태의 헤롯은 우리의 옛 자아가 사회생활을 하는 것과 똑같지 않나요? 사회에서 누군가와 경쟁(분쟁)하고 결국 ‘먹거리’ 때문에 그들과 화합하고 연합하고 아첨하면서 늘 높은 위치에 서 있기를 바라죠. 성경은 이것이 바로 예수님을 잃어버린 자들의 모습이라는 것을 가르치고 있는 것입니다.
즉, 베드로를 잃어버린 헤롯의 에피소드는 예수님을 잃어버린 옛 자아가 오직 사회생활, 즉 인본주의에 묶여서 그것만 열중하는 모습을 표현한 것입니다. 이런 모습은 절대 복음을 알아갈 수 있는 상태가 될 수가 없기 때문에 ‘죽는다’는 것을 알려주시는 것이죠.
끝
P.S 매주 금요일은 전도에 대한 반복 메시지를 올려 드립니다. 사명이라고 생각하지는 마시고 그냥 살아가시다가 "마음이 가난한 자"가 눈에 들어오면 이 묵상을 권해 주세요. "때를 얻든지 못 얻든지" 전파해 주세요.(그러나 이 뜻은 '아무 때나 무조건‘ 전하라는 말이 아닙니다. 이 말도 행위로 파악하여 책임감에 어깨가 짖 눌리신 분들이 많죠. 이 말은 "전도는 인본주의를 고려하지 말라"는 뜻입니다. )
전도는 설득이 아닙니다. 복음은 설득과 이해로 알 수 있는 것이 아니기 때문입니다. 전도는 '잃어버린 양을 찾는 것'입니다. 잃어버린 양들의 모습은 매우 동일합니다. 길을 잃어버려서 마음이 가난해져서 애통한 상태죠. 즉, 삶(인생과 신앙)의 가치를 잃고 애통한 상태에 놓여 있죠. 그런데 이 모습이 바로 '복된 모습'입니다. 복음(복)을 받을 수 있는 유일한 모습이기 때문입니다.
많은 교인들이 듣기 좋은 설교, 외롭지 않은 교회 활동, 나의 가치를 높이는 봉사와 기부활동을 통해 '신앙생활'이라는 것을 하지만 잃어버린 양들은 '참 예수님'을 만나기 전까지 늘 마음 한구석에 '텅 빈 가난함'을 인식하죠. 교회 안에서, 성경을 읽으면서 늘 모순됨을 인식합니다. 그들은 어느 순간 막혀 있는 곳에서 길을 잃어버립니다.
주위에 이런 분들이 눈에 들어온다면 이 묵상을 권해 주세요. 반대로 마음이 부유한 자들을 설득하려 하지 마세요. 마음이 부유한 자들이란 사회에서, 교회에서 자신의 가치를 쌓아가는 자들입니다.(물론 그들 중에서는 마음 깊은 곳에서 가난함을 인식하는 자들도 있겠죠) 그들에게 그 가치를 부인하고 오직 예수님의 가치만을 알리는 것은 불가능합니다. 자신의 가치와 예수님의 가치가 충돌하죠. 그리고 다시 한번 예수님을 살인(부인)합니다. 그리고 그것을 전달하는 여러분을 박해(오해)하죠. 이것은 누구도 예외가 없습니다. 이것이 가장 살벌하게 일어날 수밖에 없는 관계가 부모와 자식, 형제와 형제 즉, 가족입니다. 사랑하기에 때릴 수 밖에 없는 관계라고나 할까요!!
오직 삶(인생과 신앙)의 가치를 잃어버린 여러분의 참 형제를 찾아 이 글을 권해주세요. 그들이 결국 영원한 천국에서 여러분의 참 형제요, 자매가 되실 분입니다. 그날을 생각해 보세요^^
주말과 공휴일은 묵상이 없습니다. 친구, 가족과 재미있게 잘 보내시고 다니는 교회에서 하나님의 음성을 잘 듣도록 기도하세요. 재미있게도 눈을 뜬 자들은 어떠한 이단 목사의 설교를 통해서도 복음으로 가공해서 해석할 수가 있다는 것입니다. 이것을 예수님이 이렇게 말씀하셨죠. “그들의 행위는 본받지 말고 그들이 하는 말은 잘 지켜라 ” 어떠한 기독교 이단이라도 성경말씀을 전파하는 통로로 하나님은 사용합니다. 이 말은 어떠한 정통교회 목사라도 이단적 발언은 항상 존재한다는 말이죠. (저의 묵상을 포함해서 모든 가리키는 손가락들은 진리가 아닙니다. 오직 말씀이 가리키는 목표인 예수님을 볼 수 있어야 합니다.)
( 홈페이지 처음에 보면, 지난 묵상과 특별 묵상이 포스팅되어 있습니다. 시간 나실 때마다 계속 보시면서 묵상하세요.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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