그가 오시기에 앞서 요한이 먼저 회개의 세례를 이스라엘 모든 백성에게 전파하니라
요한이 그 달려갈 길을 마칠 때에 말하되 너희가 나를 누구로 생각하느냐 나는 그리스도가 아니라 내 뒤에 오시는 이가 있으니 나는 그 발의 신발끈을 풀기도 감당하지 못하리라 하였으니
직전 묵상에서 바울은 구약의 역사를 나열하면서 예수님의 등장 배경에 대하여 설교했습니다. 오늘부터는 그 예수님에게 중심을 맞추어서 설교를 하는 장면입니다. 참 기독교는 예수님이라는 신을 믿는 종교가 아닙니다. 기독교는 성령께서 선택된 나에게 오셔서 예수님의 정체성을 알려주는 것입니다.
그러나 깨닫는 것, 그 자체가 목적이 되어서도 안됩니다. 깨달음 자체가 목적이 아니기 때문입니다. 기독교의 본질, 목적은 오직 ‘예수님의 판단’이 유일합니다. 복음에 눈을 뜨게 되는 것, 즉 복음을 알게 되는 것은 선택된 자들에게 나타나는 현상일 뿐이지 그 깨달음 자체가 구원의 조건이 아니라는 것입니다.( 어렵죠? 불교에서는 이렇게 깨달음을 통해 해탈의 길로 들어서는 방향성에 서 있죠. 즉, 깨달음도 결국 ‘나의 능력’에 묶여 있는 것입니다. 그러나 기독교는 이 모든 것이 예수님께 의존됩니다. 이것을 소망이라고 하죠. )
성경에서도 가룟유다가 예수님을 판 자신의 행위가 잘못되었다는 것을 깨닫죠. 그리고 예수님을 십자가에서 직접 처형한 로마 군인도 예수님이 하나님의 아들이었다는 것을 깨닫죠. 그러나 그들이 완벽한 구원을 받았을까요? 그것은 아무도 모릅니다. 이 깨달음이 구원의 필수조건이 아니기 때문입니다.
그러나 예수님의 우편 강도는 완벽한 구원의 확답은 받은 자입니다. 그의 깨달음 중에 이런 고백이 있습니다. ‘천국에 가서 나를 기억하소서’ 즉, 모든 구원이 예수님의 기억(판단)에 달려 있다는 것의 고백이죠. 그래서 이것을 성경을 읽는 우리에게 알려주기 위해 그 우편 강도에게 굳이 ‘넌 낙원에 나와 함께 있을 것’이라는 구원의 확답을 하신 것입니다. 즉, 이 글을 읽는 ‘나’때문이죠.
24절을 보면, ‘그가 오시기에 앞서 요한이 먼저 회개의 세례를 이스라엘 모든 백성에게 전파하니라’ 라는 구절은 요한이라는 인물과 그 당시 요한의 세례 행위에만 국한한 이야기를 하는 것이 아닙니다. 이것은 바로 구약 전체를 이야기하는 것입니다. 즉, 구약의 모든 선지자들이 와서 ‘예수님을 믿을 준비를 하라’는 것을 계속 이야기했다는 것을 뜻합니다. 사실 구약은 이것이 전부입니다.
고로, 회개란 내가 변하는 것이 아닙니다. 내가 결코 변할 수 없다는 것을 알고 오직 예수님(하나님의 은혜=복음=사랑=십자가)만 소망하는 것을 회개라고 합니다. 조금 복잡하지만 진정한 복음의 이해를 위해서 조금 더 단계를 나누어서 설명할께요. 조금 어렵습니다. 잘 들어보세요.
조금 이상하게 들리겠지만 구원의 본질상 이렇게 내가 죄인인 것을 알고 예수님만 소망한다고 해서 구원을 받는 것은 아닙니다. 왜냐하면 구원은 나의 ‘뉘우침’이 필수조건이 아니기 때문입니다. 즉, 이렇게 예수님만 소망해도 예수님께서 ‘넌 내가 선택한 자가 아니다.’라는 결정을 하셨다면 그는 구원받지 못하게 되죠. 어렵고 두렵고 떨리죠? 그래서 바울도 이런 말을 했습니다.
“빌2:12 그러므로 나의 사랑하는 자들아 너희가 나 있을 때뿐 아니라 더욱 지금 나 없을 때에도 항상 복종하여 두렵고 떨림으로 너희 구원을 이루라 ”
그런데 성경은 이런 복음의 비밀을 선택된 자들에게만 알게 하신다고 합니다. 그리고 그 마음에 소망(소원)을 품게 하신다고 하죠. 즉, 내가 죄인인 것을 알고 예수님만 소망하는 길에 서 있는 자는 그런 깨달음의 현상이 바로 구원의 현상임을 알려주시는 것입니다. 반전의 반전이죠? 그리고 어렵죠? 그래서 이런 말씀도 나오게 됩니다
“빌2:13 너희 안에서 행하시는 이는 하나님이시니 자기의 기쁘신 뜻을 위하여 너희에게 소원을 두고 행하게 하시나니”
“롬1:17 복음에는 하나님의 의가 나타나서 믿음으로 믿음에 이르게 하나니 기록된 바 오직 의인은 믿음으로 말미암아 살리라 함과 같으니라”
‘믿음으로 믿음에 이르게 하나니’ 너무 유명한 구절이지만 그 진정한 뜻을 아는 자는 많지 않죠. 여기서 첫 번째 나온 믿음을 ‘(복음을) 알게 됨’으로 해석을 하면 매우 자연스러워집니다. 즉, ‘복음을 알게 됨으로 믿음에 이르게 하나니’로 해석하시면 됩니다. 즉, 복음을 알게 되면서 참 믿음을 알게 되는데 그 참 믿음은 다시 더 깊은 복음을 알게 하죠. 그래서 더 깊은 믿음에 이르게 하죠. 그리고 그 더 깊은 알게 됨은 더 더 깊은 믿음(앎)에 이르게 하죠. 이런 순례자의 삶을 뜻합니다. 이해가 가시죠?
그런데 이런 ‘알게 됨(믿음)’은 바로 ‘하나님의 의’가 나타났기 때문이라고 선언되어 있습니다. 하나님의 의는 오직 예수님입니다. 즉, 예수님이 복음의 출처라는 뜻입니다. 그래서 결론은 ‘의인은 믿음으로 말미암아 살리라’입니다.
사실 문맥상 ‘죄인은 믿음으로 말미암아 의인이 되어 살리라’가 되어야 하는데 그렇지 않죠? 그래서 선택된 백성은 태초에 이미 결정되어 있다는 예정설이 나오게 되는 것이죠. 그리고 여기서 말한 의인도 결국 예수님을 가리키고 우리는 그분의 지체이므로 ‘한몸원리’에 입각한 복음의 가르침을 주신 것이죠.
오늘 말씀25절 보면, 요한이 매우 겸손하게 말하는 것처럼 보이지만 이 구절은 그런 차원의 구절이 아닙니다. 이 구절은 구약에 나오는 예수님을 가리키는 모든 표지판들은 그 분의 신발끈 풀기도 감당하지 못할 정도로 비교할 수 없는 가치(그림자)일 뿐이라는 것입니다. 이것은 선지자 뿐만이 아니라 구약의 모든 제사, 십일조, 안식일 등등 그 어떤 것도 전부 다 포함된 것입니다.
그러나 지금 현대 교회는 예수님을 너무 너무 무시하고 있죠. 25절 중간에 나온 문구 ‘나(요한)를 누구로 생각하느냐?’라는 요한의 질문을 항상 상기하십시오. 만약 당신이 교회에서 봉사를 하고 계십니까? 그 봉사일이 당신에게 묻습니다 ‘당신이 뭐라고 생각하느냐?’ 교회에 헌금을 잘하고 계십니까? 그 헌금이 당신에게 묻습니다. ‘당신이 뭐라고 생각하느냐?’
답은.... 아무것도 아니라는 것입니다. 현대 교회의 모든 프로그램, 제도, 규례 또한 예수님을 가리키는 표지판이지만 이미 실체로 오신 예수님이 계시기 때문에 그 표지판은 다 부질없는 티끌 중 하나일뿐입니다. 심지어 우리는 봉사와 헌금을 예수님께 바치는 이방 종교인이 되어가고 있죠. 교회도, 목사도, 신앙도 결코 여러분을 구원할 수 없습니다. 오직 예수님만이 가능하시죠.
참 기독교는 내가 예수님의 발을 닦아주는 종교가 아닙니다. 예수님이 나의 발을 닦아주고 있다는 것을 알게 되는 것입니다.
끝
'사도행전(완료)' 카테고리의 다른 글
행13:30-37(22.08.10.수) (0) | 2022.08.10 |
---|---|
행13:26-29(22.08.09.화) (0) | 2022.08.09 |
행13:19-23(22.08.05.금) (0) | 2022.08.05 |
행13:17-18(22.08.04.목) (0) | 2022.08.04 |
행13:13-16(22.08.03.수) (0) | 2022.08.03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