형제들아 아브라함의 후손과 너희 중 하나님을 경외하는 사람들아 이 구원의 말씀을 우리에게 보내셨거늘
예루살렘에 사는 자들과 그들 관리들이 예수와 및 안식일마다 외우는 바 선지자들의 말을 알지 못하므로 예수를 정죄하여 선지자들의 말을 응하게 하였도다
죽일 죄를 하나도 찾지 못하였으나 빌라도에게 죽여 달라 하였으니
성경에 그를 가리켜 기록한 말씀을 다 응하게 한 것이라 후에 나무에서 내려다가 무덤에 두었으나
26절 보면 매우 재미있는 표현이 나옵니다. 바울은 예수님을 ‘구원의 말씀’이라고 표현을 하고 있죠. 이 부분은 요한복음 1장을 펼치시면 매우 정확하게 나옵니다.
“ 요1:1-4 태초에 말씀이 계시니라. 이 말씀이 하나님과 함께 계셨으니 이 말씀은 곧 하나님이시니라. 그가 태초에 하나님과 함께 계셨고 만물이 그로 말미암아 지은 바 되었으니 지은 것이 하나도 그가 없이는 된 것이 없느니라. 그 안에 생명이 있었으니 이 생명은 사람들의 빛이라 ”
여러분이 생각하는 조금 잘못된 상식이 있습니다. 이 ‘말씀’이라는 단어입니다. 많은 사람들은 ‘말씀’을 ‘성경말씀(글자)’이라고 착각합니다. 그러나 이것은 사실 착각이 아니기도 합니다. 그러나 착각입니다. 어렵죠? 그만큼 가장 어려운 문제이기 때문입니다.
기독교는 예수님을 신으로 믿는 종교가 아닙니다. 기독교는 성령께서 선택받은 자들에게 오셔서 예수님의 정체성을 알려주는 것이라고 했습니다. 그런데 ‘말씀의 정체성’도 정확하게 예수님의 정체성과 동일합니다.
장사하는 교인의 가게에 가서 보면 이런 말씀이 액자에 자주 걸려 있습니다. ‘네 시작은 미약하나 나중은 창대하리라’ 그리고 이런 말씀을 걸어 놓고 장사하는 교인들을 ‘믿음이 좋으신 분인가봐요~~~~’라고 서로 서로 칭찬하죠. 이런 것을 코미디라고 합니다.
성경 말씀은 모두 비밀로 봉인이 되어 있습니다. 그것이 요한 계시록에 자세히 나오죠. 계시록에 보면 가장 자주 나오는 구절이 ‘인 중에 하나를 떼시는데...’라는 구절입니다. 정확하게 이 구절이 바로 봉인되어 있는 말씀의 비밀을 선택한 백성에게 알려주신다는 것을 가리킵니다.
이제 눈치 채셨나요? 그렇습니다. 성령께서 알려주지 않은 ‘성경말씀’은 그냥 ‘불교의 경전’과 매일반입니다. 그냥 ‘좋은 글’입니다. 그런데 성령께서는 선택받은 자들에게는 그 말씀의 진정한 정체를 드러내시죠. 인을 떼시게 됩니다.
그리고 모든 성경 말씀의 진정한 정체는 바로 ‘예수 그리스도’입니다. 그래서 선택받은 자들은 창세기 1장부터 요한계시록에 담긴 모든 단어가 오직 예수 그리스도를 가리킨다는 것을 알게 됩니다. 그들에게는 성령께서 인을 떼서 가면서 하나씩 풀어서 설명을 해주시죠. 요한 복음 1장은 바로 그것을 알게 된 요한이 쓴 글입니다.
그래서 오늘 바울도 26절에서 ‘구원의 말씀’을 우리에게 보내셨다고 이야기하고 있는 것입니다. 바울도 말씀의 정체가 바로 예수님이라는 것을 알았기 때문입니다. 그래서 ‘네 시작은 미약하나 나중은 창대하리라’는 말씀도 결국 복음의 주인공인 예수님에 대한 것입니다. 그 말씀을 가지고 ‘이 말씀을 믿고 있으면 내 사업이 잘될 것이다.’라고 굳게 믿는 사람이나 그것을 그렇게 믿으라고 액자를 선물하는 교회 지도자나,그것을 보고 그들의 믿음이 좋다고 박수치는 친한 교인들이나 모두 맹인일 뿐이라는 것입니다. (이 구절은 짐승의 먹이로 오셔서(말구유에서 태어나심) 결국 복음의 주인공이 되셔서 심판장의 자리에 앉으신, 천국에서 가장 큰 자(창대)가 된 예수님을 가리키는 구절입니다.)
그래서 27절 보면, ‘예루살렘에 사는 자들과 그들 관리들이 예수와 및 안식일 마다 외우는 바 선지자들의 말을 알지 못하므로 예수를 정죄하여’라고 되어 있습니다. 이자들은 지금 교회의 모든 교인을 통칭하는 것입니다. 그들은 말씀의 정체를 알지 못했기 때문에 그 말씀의 정체성의 주인인 예수님을 정죄했다고 나오죠. 무섭죠?
안식일의 정체는 예수님입니다. 안식을 지켜야 산다는 말은 예수님의 품속에 들어가 그 분의 지체로써의 위치를 지키라는 뜻입니다. 그런데 교회는 그것을 일요일이라는 날짜로 바꾸고 그 날을 성스러운 날로 정해서 ‘주일성수 하자’라고 바꾸어 버렸죠. 이것을 바로 ‘예수님을 정죄(버리다)했다.’라고 하는 것입니다. 그래서 하나님은 교회의 문을 닫았죠. 구약의 말라기에서도 닫으셨고 지금의 코로나에서도 교회의 문을 닫으셨죠.
“말1:10 만군의 여호와가 이르노라 너희가 내 제단 위에 헛되이 불사르지 못하게 하기 위하여 너희 중에 성전 문을 닫을 자가 있었으면 좋겠도다 내가 너희를 기뻐하지 아니하며 너희가 손으로 드리는 것을 받지도 아니하리라”
이렇게 그들은 예수님을 정죄하여 죽였지만 27-29절에 보면 이 모든 것은 말씀을 응하게 하기 위한 것이라고 나옵니다. 즉, 하나님께서는 복음을 이루시기 위해 ‘악’도 사용하신다는 것을 설명하고 있습니다.
구약에 보면, 우리가 먹지도 못하고 만지지도 못하는 부정한 짐승에 대한 규례가 나옵니다. 그런데 이상하죠? 이 부정한 짐승은 누가 만들었을까요? 하나님이시죠. 즉, 부정한 것이 부정한 것이 아니고 악한 것이 악한 것이 아니라는 말이 됩니다. 즉, 부정한 것이 아니라 부정한 역할일 뿐입니다. 검은색을 들어서 흰색을 설명하는 이치죠.
그래서 내가 읽은 성경 말씀이 스님도 이해가 되고 철학과 교수도 이해가 된다면 그것은 말씀이 아닙니다. 그냥 글자일 뿐이죠. 선택된 자들은 말씀의 정체성을 알게 됩니다.
끝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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