이 이스라엘 백성의 하나님이 우리 조상들을 택하시고 애굽 땅에서 나그네 된 그 백성을 높여 큰 권능으로 인도하여 내사
광야에서 약 사십 년간 그들의 소행을 참으시고
오늘부터 본격적인 바울의 설교(책망)입니다. 너무 길어서 중간 중간 잘라서 묵상을 하겠습니다.
17절에서 보듯 복음의 첫 시작은 바로 ‘하나님의 선택’입니다. 그리고 선택된 자들은 바로 ‘애굽과의 분리’가 시작됩니다. 애굽은 당연히 ‘인본주의’를 가리키는 표지판입니다. 인본주의는 작게는 ‘나’ 중심의 세계를 말하고 크게는 ‘인류’ 중심의 세계를 말하죠. 그래서 개인주의도 인본주의며, 민주주의도 인본주의입니다. 당연히 사회주의도 인본주의입니다. 즉, 개인이 되었던, 공동체가 되었던 ‘인간’이 기준이 되는 그 어떤 것도 모두 인본주의입니다. 그 정점에 서 있는 것이 바로 ‘정치’입니다. 인간의 정치에 매몰되는 것은 인본주의 무덤에 매몰되는 것과 같습니다.
구약의 바벨탑과 가장 비슷한 상징이 바로 인간의 정치입니다. 그래서 바벨탑을 무너뜨리듯이 하나님은 인간의 모든 정치를 100% 다 망하게 하십니다. 간혹 조금 긴 역사를 이어가는 정치도 있죠. 그 이유는 바로 성령님께서 ‘복음의 계획’의 도구로 이용하시기 때문입니다. 공산주의보다 민주주의가 더 좋은 제도이기 때문에 민주주의가 더 많이 살아남는 것이 아닙니다. 그 시기에 공산주의 보다 민주주의가 더 복음의 도구로 활용될 가능성이 높기 때문에 더 많이 남겨 놓으신 것뿐입니다. 이런 역사적 흐름 때문에 우리나라에도 복음이 들어왔죠.(이런 복음적 세계관을 잘 이해하셔야 합니다. 복음의 진영에 들어 있는 사람은 역사와 정치의 노선도 오직 복음의 눈으로 볼 수 있어야 합니다.)
역사적으로 가장 신기한 것이 모든 ‘제국’은 다 망한다는 것입니다. 신기하게도 인간 세상의 정치와 권력은 강력해 질수록 결국 망하게 되죠. 이것은 인간의 논리로는 이상한 현상입니다. 매우 작은 나라도 몇 천년을 이어가는데 이상하게도 ‘제국’만 되면 매우 짧은 기간에 망하게 되죠.
한국의 정치도 수 많은 정당들이 사라졌다가 만들어지기를 반복합니다. 하지만 그 당시 그 정당에 속한 자들은 오직 그 정당만을 바라보는 해바라기였죠. 또한 많은 정치인과 대통령이 감옥에 들어갔죠. 이렇게 제국이 땅에 떨어지고, 왕과 대통령들이 땅에 떨어지는 것을 요한 계시록에서는 이렇게 말씀하고 있습니다.
“계6:12-15 내가 보니 여섯째 인을 떼실 때에 큰 지진이 나며 해가 검은 털로 짠 상복 같이 검어지고 달은 온통 피 같이 되며 하늘의 별들이 무화과나무가 대풍에 흔들려 설익은 열매가 떨어지는 것 같이 땅에 떨어지며 하늘은 두루마리가 말리는 것 같이 떠나가고 각 산과 섬이 제 자리에서 옮겨지매 땅의 임금들과 왕족들과 장군들과 부자들과 강한 자들과 모든 종과 자유인이 굴과 산들의 바위 틈에 숨어”
이 모든 것의 종합체가 바로 ‘인본주의’입니다. 그리고 그 인본주의의 대표적인 상징이 바로 ‘애굽’이죠. 그리고 하나님은 이 애굽에서 살아가는 선택된 백성을 애굽의 ‘포로’의 신분으로 여기고 계십니다.
‘가스라이팅’이라는 단어가 요즘 사회적 이슈죠. 가스라이팅은 가해자와 피해자가 한 공간에서 오래 살게 되면 피해자가 가해자에게 길들여지는 현상을 말합니다. 그래서 본인이 피해자이면서 가해자가 무엇을 조금만 나누어 주어도 그것에 매우 고마워하는 상황에까지 이르게 되죠.
이스라엘은 애굽의 포로로 있으면서 노동을 통해 애굽이 나누어준 약간의 고기에 감사하며 그것을 희망하고 목표하며 살아갔습니다. 이런 이스라엘의 모습이 바로 인본주의에 묶여 있으면서 인본주의 꼭대기를 늘 사모하고 약간의 행복에 묶여 사는 ‘나’를 상징하는 것입니다. 하나님이 선택한 백성을 구원하시기 위해 시행하는 첫번째 단추가 바로 선택된 자들에게 이런 자신의 정체성을 먼저 확인시키는 것입니다. 이후 두번째 단추가 인본주의와의 분리입니다. 이렇게 분리된 나는 이후로는 17절에 표현된 것 처럼 이 세상에서 ‘나그네’의 삶을 살죠.
그런데 우리가 인본주의와 분리된다는 것은 현실에서는 존재하지 않습니다. 이것은 깨달음의 현상이죠. 그래서 성경은 이 깨달음 이후에 이 세상을 바라보는 관점을 아무것도 없는 ‘광야’로 표현합니다. 모든 가치의 붕괴를 말합니다. (하나님을 모른 채 이것을 깨닫는 자들도 존재합니다. 이들은 극심한 우울증, 상실감, 무력감등을 경험하죠. 심지어 자살까지 이어집니다.)
그러나 예수님(하나님)의 품에 안긴 자들은 더욱 예수님의 품으로 파고들어 그 분만을 소망하고 그분의 얼굴만을 소망하며 살게 됩니다. 이 부분이 이스라엘의 광야 시절 오직 구름기둥과 불기둥만을 의지하며 살아가는 삶으로 표현된 것입니다.
18절 ‘광야에서 약 사십 년간 그들의 소행을 참으시고’ 이스라엘 사람들은 광야 생활 내내 하나님께 불평을 쏟아 냅니다. 인본주의의 삶을 그리워하죠. 하나님 대신 우상을 만들기도 하고, 물이 없어 불평하고, 고기가 없어 불평하죠.
우리가 복음을 알게 된다고 해도 우리는 이스라엘과 똑같이 늘 ‘인생의 불만’ 속에 살아갑니다. 즉, 인본주의가 주는 행복과 불행에 휩쓸린다는 것이죠. 그런데 신기하게도 우리는 이 과정이 있어야만 예수님이 필요하다는 것을 소망하게 됩니다. 즉, 나는 절대 인본주의에서 벗어나거나 변화될 수 있는 존재가 아니라는 사실을 알게 되는 것입니다. 그래서 '역시 예수님이 오실 수 밖에 없구나~~~’라는 복음의 핵심을 나의 삶을 통해 알게 되죠. 이것을 ‘증인의 삶’이라고 합니다. 이것이 바로 우리가 인생을 살아가는 유일한 이유입니다.
민수기11장을 보면 매우 재미있는 사건이 나옵니다. 이스라엘 백성이 고기를 먹지 못해서 애굽을 그리워하고 하나님을 원망하죠. 그래서 하나님께서 메추라기라는 고기를 지면에 가득하게 내려주십니다. 그런데 그 고기가 그들이 이빨 사이에 들어가서 씹히기 전에 하나님께서는 이스라엘 백성을 큰 재앙으로 치시죠.
대부분의 교회에서는 이 장면을 사용해서 ‘하나님께 감사기도, 감사헌금 드리는 것을 잊어 버리면 큰 재앙이 닥친다’라고 설교는 합니다. 엉터리죠. 이 장면은 인본주의에서 분리된 선택된 자들도 끊임없이 인본주의를 뒤 돌아 보고 그리워한다는 것을 말합니다. 그리고 그들은 계속해서 하나님께 인본주의 행복을 요구한다는 것을 이야기하는 것입니다.
그런데 이상한 장면, 이상한 결과가 나타나죠. 그들의 요구를 들어주신 하나님, 그런데 그들에게 재앙을 내리신 하나님. 이해할 수 없는 맥락입니다. 소원을 들어주시지 말던가! 아니면 소원을 들어주었다면 왜 재앙을 내리셨을까? 그러나 이것은 바로 ‘우리가 인본주의 행복을 요구하고 그것을 하나님이 다 들어주게 되면 너희는 결국 (영원히) 죽는다.’는 것을 우리에게 가르치는 것입니다. 이해가 되십니까? 어렵나요?
교회에서 간혹 ‘김집사가 기도했더니 좋은 집을 샀다.’라는 종류의 말을 들어 본 적이 있죠? 이런 식의 기도와 응답은 결코 '참예수님'을 소망하는 길에 놓여 있지 못하게 됩니다. 즉, 사실은 죽는 길입니다. ‘아닌데~~~ 예수님께 기도 했더니 좋은 집을 샀으니까 나중에는 더 큰집을 달라고 예수님을 더 소망하게 되는 것 아닌가? ’ 라는 방향성에 대부분의 기독교인이 놓여 있죠. 그러나 이때 기도 속의 예수님은 그냥 ‘우상’일 뿐입니다. 이것이 바로 재앙이라는 것을 가르치기 위해 하나님께서는 민수기의 이빨고기의 에피소드를 기록하신 것이죠.
진정한 기독교는 예수님이라는 신을 믿는 것이 아닙니다. 예수님의 정체성(이름)을 알게 되는 것이죠. 즉, 이 세상에 어떠한 소망도 없다는 것을 알게 되어 오직 예수님만이 길이며, 진리며, 생명이라는 것을 알게 되는 것입니다. 이 두 가지 로 갈리는 것을 심판이라고 합니다.
(( 집안에 문제가 생기고 그것을 해결해달라는 기도를 쌓는 행위에서 벗어나셔야 합니다. 선택받은 자들은 그 문제를 통해 하나님께서 내가 무엇을 알기를 원하시는지 그것을 기도하셔야합니다. 그러기 위해서는 하나님은 나에게 어떤 계획을 가지고 있으시고 그 계획의 주인공이신 예수님은 어떤 분이신지를 알아야 하겠죠. 그렇다면 성경과 인생을 통해 끝없는 고민을 해야합니다. 즉, 기도는 24시간 지속이 될 수 밖에 없습니다. 즉, 쉬지말고 기도해야합니다. 더 잔인하게 말씀드리면 기도를 쉬는 죄를 범하지 말아야 합니다. ))
끝