사도행전(완료)

행13:30-37(22.08.10.수)

은혜바라기 2022. 8. 10. 08:08

하나님이 죽은 자 가운데서 그를 살리신지라 
갈릴리로부터 예루살렘에 함께 올라간 사람들에게 여러 날 보이셨으니 그들이 이제 백성 앞에서 그의 증인이라
우리도 조상들에게 주신 약속을 너희에게 전파하노니
곧 하나님이 예수를 일으키사 우리 자녀들에게 이 약속을 이루게 하셨다 함이라 시편 둘째 편에 기록한 바와 같이 너는 내 아들이라 오늘 너를 낳았다 하셨고
또 하나님께서 죽은 자 가운데서 그를 일으키사 다시 썩음을 당하지 않게 하실 것을 가르쳐 이르시되 내가 다윗의 거룩하고 미쁜 은사를 너희에게 주리라 하셨으며
또 다른 시편에 일렀으되 주의 거룩한 자로 썩음을 당하지 않게 하시리라 하셨느니라
다윗은 당시에 하나님의 뜻을 따라 섬기다가 잠들어 그 조상들과 함께 묻혀 썩음을 당하였으되
하나님께서 살리신 이는 썩음을 당하지 아니하였나니


 오늘의 묵상은 ‘예수님의 부활’입니다. 복음의 눈으로 본 부활은 과연 어떤 의미를 가졌을까요? 

 일단 많은 교인들이 바라보는 예수님 부활의 의미는 말 그대로 ‘예수님이라는 분이 죽었다가 살아나셨다.’라는 의미죠. 이것은 나와 예수님을 각각 다른 존재로 인식하고 있는 것이므로 복음과는 거리가 멀죠. 

 예수님은 인자 예수님으로 오셨습니다. 이때 ‘인자’란 바로 ‘나’를 말합니다. 즉, 나로 오신 것입니다. 왜 예수님이 '나'로 오셨을까요? 하나님께서는 ‘나’를 선택하셔서 ‘나’를 구원하셔야 하는데 그 어떤 조건과 능력으로도 ‘나’라는 ‘재료’로는 절대 구원이 성립하지 못합니다. 조금 어렵습니다. 기도하는 마음으로 성령께 의지하면서 이해하세요. 

 ‘나’는 이미 영적으로 죽은 존재입니다. 먼저 육, 혼, 영이라는 개념부터 설명드리죠. ‘육’은 우리의 육체를 말하는데 이것은 살과 피뿐 아니라 생각, 마음 등의 감정과 기억까지 통틀어 ‘육’이라고 합니다. 그리고 ‘혼’의 정체는 정확하게 ‘생명’입니다. 만약 사람의 심장을 칼로 찔러 죽인 후 다시 심장을 실로 잘 꼬매고 기계를 이용해서 심장을 다시 펌프질 한다고 해도 죽은 사람이 다시 살아 돌아올 수가 없죠. 하지만 논리적으로 살펴보면, 그 사람은 다시 살아서 움직여야 합니다. 심장 처치 전, 후의 모든 조건이 똑같기 때문입니다. 도대체 뭐가 다르길래 다시 살지 못할까요? 바로 ‘혼’이라는 ‘생명’이 없어진 것입니다. 

 반대의 상황으로도 한번 더 생각해 보죠. 사람이 갑자기 심장마비를 겪게 되어도 이른 시간에 CPR(심장 마사지)을 하면 그 사람은 다시 살아납니다. 사실 생물학적으로 심장이 정지되었다면 그 사람은 죽은 것입니다. 그런데 어떻게 다시 살아나죠? 바로 ‘혼’이라는 ‘생명’이 그 사람에게서 떠난 것이 아니기 때문입니다. 이렇게 육과 혼은 사람 뿐만이 아니라 동물에게도 존재합니다. 그래서 성경에는 동물의 혼에 대한 말씀이 나옵니다. 

 “전3:21 인생들의 혼은 위로 올라가고 짐승의 혼은 아래 곧 땅으로 내려가는 줄을 누가 알랴”

 “욥 12:10 모든 생물의 혼과 모든 인류의 호흡이 그의 손 안에 있느니라”
 
 그런데 ‘영’은 오직 사람에게만 존재합니다. 그런데 그 영이 존재했던 시간은 매우 짧았습니다. 인간이 선악과를 먹기 전까지만 존재했죠. 즉, 인간의 ‘영’의 정체는 바로 ‘성령’입니다. 그리고 창세기에서는 '영'을  ‘하나님의 호흡’으로 표현하셨죠. 그런데 인간이 하나님과 분리되는 순간(이것을 인본주의라고 합니다. = 이것의 진행과정을 시청각으로 표현한 것이 선악과 에피소드입니다.) 인간은 ‘영’에서 분리된 존재, 즉 영적으로 죽은 존재가 된 것입니다. 지금의 인간은 사실 매우 똑똑한 짐승일 뿐이죠. 

 이미 죽은 자는 어떠한 심폐소생술로도 다시 살릴 수가 없죠? 그것이 바로 영적 표지판입니다. 영적으로 죽은 인간은 어떠한 방법으로도 ‘인간 스스로의 능력’으로는 다시 영적으로 살릴 수 있는 방법이 없습니다. 그래서 영적으로 죽지 않은 존재이신 인자 예수님께서 이 땅에 오신 것입니다. 

 그 분은 영적으로 살아 계신 채 탄생하셨고 절대 죄를 짓지 않으셨기 때문에, 즉 하나님과 절대 분리된 적이 없으셨기 때문에 그분은 절대 죽으시면(분리되시면) 안 됩니다. 그런데 그분은 스스로 하나님의 명령에 순종해서 죽으셨죠.(그래서 오직 영적으로 살아계신 예수님만이 “나의 하나님 어찌하여 나를 버리시나이까?”를 외칠 수 있는 것입니다.)

 

 즉, 예순님께서는 우리와 반대의 모순(죄가 없는데 죽으심)이 일어나신 것입니다. 그래서 하나님께서 그 분을 살리셨죠. 그런데 이것이 공평한 것일까요? 물론 ‘육, 혼, 영’적으로 죽지 말아야 할 분이 죽으셨기 때문에 다시 부활하신 것은 맞지만 이것은 단지 원위치된 것뿐입니다. 즉, ‘그분이 죽었던 모순’에 대한 대가를 받으셔야 한다는 것이죠. 그 대가가 바로 ‘그분의 신부들의 부활입니다.’ 그 신부들은 교회라고 합니다. 곧 ‘나’죠. 이것이 바로 복음의 메커니즘입니다. 
 
 그래서 죽은 우리는 오직 예수님만이 소망이 됩니다. 이것이 예수님의 정체성이자, 말씀의 정체성이자, 복음의 정체성입니다. 

 이 세상은 모두 복음을 설명하는 메카니즘을 가지고 있다고 설명드렸죠. 영화에 보면 ‘좀비’ 영화가 많습니다. 신기하게도 이 좀비가 바로 ‘인간’입니다. 좀비는 죽은 자들이지만 살아서 움직이는 존재죠. ‘나’입니다. 인간이 어떠한 상상을 하던, 어떠한 영화와 드라마를 만들던, 그 모든 것은 하나님이 이 땅에 뿌려 놓으신 창조퍼즐 안에서 진행이 되기 때문에 그 안에서 만들어진 모든 퍼즐은 그 내부에 복음을 설명하는 것이 담기게 됩니다.(영화를 만든 자들이 의도하던, 의도하지 않던 말이죠.)

 그래서 예수님의 부활의 정확한 의미는 바로 ‘나’의 부활입니다. 시간적으로는 차이가 있지만 의미적으로는 그 당시 예수님의 부활이 정확하게 ‘나’의 부활인 것입니다. 즉, 예수님의 부활은 바로 내가 어떻게, 왜 영적으로 살게 되었는지를 설명하는 하나님의 은혜의 소리입니다. 즉, 복음(복된소식)이죠. 

 

 시간과 공간에 갖혀 사는 3차원의 지금의 나는 이것을 100% 이해할 수는 없겠지만 4차원 이상의 영적 세상에서는 시간과 공간이 없고 오직 '관계'만 존재하기 때문에 예수님과 하나인 '나'는 예수님의 부활이 바로 곧 '나'의 부활이 되는 것입니다. 그리고 지금의 나는 인생을 죄인으로 살면서 예수님의 십자가와 부활로 인해 영적으로 살 수 있다는 "증인의 삶"을 체험하는 시간일 뿐이죠. 이것을 순례자의 삶이라고 합니다. 그래서 이 세상은 온통 예수님의 이야기밖에는 없는 것입니다.

 

'사도행전(완료)' 카테고리의 다른 글

행13:43-52(22.08.12.금)  (0) 2022.08.12
행13:38-41(22.08.11.목)  (0) 2022.08.11
행13:26-29(22.08.09.화)  (0) 2022.08.09
행13:24-25(22.08.08.월)  (0) 2022.08.08
행13:19-23(22.08.05.금)  (0) 2022.08.05