사도행전(완료)

행13:38-41(22.08.11.목)

은혜바라기 2022. 8. 11. 08:00

그러므로 형제들아 너희가 알 것은 이 사람을 힘입어 죄 사함을 너희에게 전하는 이것이며
또 모세의 율법으로 너희가 의롭다 하심을 얻지 못하던 모든 일에도 이 사람을 힘입어 믿는 자마다 의롭다 하심을 얻는 이것이라
그런즉 너희는 선지자들을 통하여 말씀하신 것이 너희에게 미칠까 삼가라
일렀으되 보라 멸시하는 사람들아 너희는 놀라고 멸망하라 내가 너희 때를 당하여 한 일을 행할 것이니 사람이 너희에게 일러줄지라도 도무지 믿지 못할 일이라 하였느니라 하니라


 오늘은 바울의 마지막 설교입니다. 마지막 결론의 첫 마디가 ‘그러므로 형제들아~~’입니다. 복음을 듣는 대상을 ‘형제’로 정해놓은 것이죠. 교회에서 우리는 보통 ‘형제, 자매’라는 말을 많이 씁니다. 그런데 그 의미는 당신과 내가 형제처럼 사이좋게 지내야 한다는 뜻이 아닙니다. 형제란 예수님 안에서 한몸원리를 가진 자라는 뜻입니다. 그리고 이것은 이미 태초에 정해진 것이죠. 형제는 내가 원해서 그리되는 것이 아닙니다. 이미 태어나기 전에 어머니의 배속에서 정해져 있죠. 즉, 형제라는 단어 하나에도 하나님의 예정설과 한몸원리라는 두 가지 복음의 원리가 숨어있습니다. 

 오늘 바울 설교의 마지막 결론에 나온 세 구절은 복음을 압축해 놓은 액기스 같은 것이므로 깊이 묵상하시기를 바랍니다. 

 38절에 보면, ‘이 사람(예수님)을 힘입어 죄 사함을 전한다'고 합니다. 성경이 말하는 죄와 우리가 생각하는 죄는 차이가 큽니다. 우리가 죄라고 생각하는 살인, 간음 , 절도, 거짓말 등등은 ‘죄’가 아니라 죄의 증상일 뿐입니다. 성경이 말하는 죄란 ‘하나님과의 분리’입니다. 이 과정을 다룬 것이 바로 선악과 에피소드죠. 

 죄의 정의가 하나님과의 분리이기 때문에 우리는 모두 영적으로 죽은 자입니다. 이렇게 영적으로 죽은 자를 바로 ‘죄인’이라고 하는 것입니다. 즉, 우리는 살인, 간음, 거짓말과 같은 죄를 짓게 되어 죄인이 되는 것이 아니라 우리가 이미 죄인(죽은 자)이기 때문에 살면서 그 섞은 증상이 저절로 나오게 되는 것입니다. 그래서 나의 참 정체성이 죽은 자라는 사실을 깨닫도록 하신 것이죠. 

 그런데 오직 살아 계신 자인 예수님이 오셨죠. 그래서 그 분의 생명 안에 들어가면 우리는 거듭나는 자, 즉 새로운 피조물이 됩니다. 이것이 오늘 38절에 나온 예수님을 힘입어 죄 사함을 받게 된다는 것입니다. 

 단순하게, ‘나는 예수님을 믿습니다. 그래서 난 죄 사함 받습니다.’라는 고백은 참일까요? 거짓일까요? 이 고백을 선택받은 자가 하게 되면 참이 됩니다. 그러나 유기된 자가 하면 거짓이 되죠. 즉, 이 고백의 표면만 읽어 내는 것은 의미가 없습니다. 이 고백의 참 정체성을 알게 되는 것이 의미가 있죠. 그리고 그 의미는 성령께서 오직 예수님의 신부에게만 알려주시죠. 

 39절에 보면, ‘모세의 율법으로 의롭다 하심을 얻지 못하던’이라고 나옵니다. 모세의 율법은 613가지죠. 세부 사항까지 따지면, 2134가지가 됩니다. 그리고 그것을 압축한 것이 10계명이죠. 그러나 10계명은 계명이 10개이므로 10계명이 아닙니다. 계명은 완전하다라는 것을 표현하시기 위해 10개로 압축해서 일부러 표현한 것 뿐입니다. 10이라는 숫자가 완전함를 표현한 숫자이기 때문입니다. 원래는 613가지나 되죠. 

 인간이 선악과를 먹은 이유는 그것을 먹고 하나님의 자리까지 스스로 올라가기 위해서입니다. 즉, 하나님과 같이 자신이 스스로 ‘선’해지기 위해서죠. 인간은 스스로 그렇게 할 수 있다고 생각을 하게 된 것이죠. 그래서 하나님은 인간에게 ‘할 수 있으면 해봐~~’ 라고 주신 기회가 바로 율법입니다. 즉, 하나님의 율법을 진짜로 완벽하게 지킨다면 정말 하나님과 같이 된다는 것입니다.(그래서 온 율법을 다 지키신 예수님이 하나님이신 것입니다.)

 그런데 어떠한 인간도 하나님의 율법을 단 한 가지도 지켜낼 수 없습니다. 율법은 인간이 스스로 지켜내기에 너무 높은 수준이기 때문입니다. 그런데 인간은 그 율법을 인간의 수준으로 낮추어서 지켜내는 꼼수를 행했죠. 이렇게 ‘인간의 기준’으로 선과 악의 기준을 삼는 것을 ‘인본주의’라고 합니다. (그래서 모든 사람은 뉴스에 나오는 살인자를 보면서, ‘이런 나쁜 살인자~~’ 라고 비판합니다. 그것을 보면서 ‘내가 살인자였구나~~' 라고 생각하지 못하죠. )

 그런데 이 율법의 기준을 다 지켜내시고 이 율법의 기준을 다시 풀어서 말씀해 주신 분이 바로 예수님이시죠. 산상수훈에서 그것을 풀어내셨죠. 형제를 미워만 해도 살인, 마음에만 품어도 간음이라는 수준으로 회복시키셨죠. 율법은 인간이 어찌 어찌 해볼 수 있는 수준이 아닙니다. 예수님께서는  십자가에서 그 모든 율법의 기준을 다 이루어내셨습니다. (이 부분은 해석이 너무 길어져서 생략합니다.)

 그래서 39절 하반절에 ‘이 사람을 힘입어 믿는 자마다 의롭다 하심을 얻는 이것이라’라는 구절이 나오게 되는 것입니다. 즉, 예수님을 믿게 되면 그 자도 의롭다, 즉 모든 율법을 다 이룬 것이라고 칭함받게 된다는 것(칭의)입니다. 하지만 ‘예수님을 믿는 것’은 입술의 고백만을 이야기하는 것이 아니라 바로 ‘예수님의 정체성’을 알게 되는 것입니다. 예수님의 정체성을 알게 되는 것은 성경 66권의 모든 내용이 예수님의 정체성에 관한 이야기이며, 이 세상 모든 천지만물이 그 분을 가리키고 있다는 사실을 알게 되는 것이며 천국의 실체는 바로 그 분과의 관계를 이야기하는 것을 알게 되는 것을 뜻합니다. 즉, 모든 길이 그분을 가리키는 것이며 그 분 자체가 길이라는 뜻입니다.

 그리고 마지막으로 40-41절에 보면, 심판의 예언과 성취에 대한 것으로 설교가 끝나죠. 즉, 선지자를 통해서 예언되었다고 말씀하시면서 ‘멸시하는 사람들아 너희는 놀라고 멸망하라’라고 되어 있습니다. 이런 그들의 멸망을 최종적으로 이렇게 표현합니다. ‘너희에게 알려줄지라도 도무지 믿지 못할 일이라 하였느니라’ 라고 표현이 되어 있습니다. 

 그렇습니다. 심판의 정체는 바로 복음을 이야기해도 그것을 알아듣지 못하는 것입니다. 그런데 어느 정도를 알아들어야 알아듣는 것이라고 할까요? “이해한다’의 수준?” 그러나 복음을 알아 듣는 것은 이해하는 수준이 아닙니다. 머리가 좋은 사람은 누구나 복음을 이해할 수 있습니다. 반대로 머리가 나빠서 이해가 잘 안될 수는 있지만 그런 자들 중에서도 알아듣는 사람이 분명이 있습니다. 어렵죠? 그래서 이런 모든 것을 감안해서 선택된 단어가 바로 ‘믿음’입니다. 

 주인을 믿는 하인을 생각해 봅시다. 하인은 주인이 항상 올바른 일을 시킨다는 것을 알고 그를 따릅니다. 그런데 가끔은 이해가 전혀 안가는 일을 시킬 때가 있습니다. 그래도 그것이 결국은 ‘선’이라는 결론에 이를 것을 알기에 이해가 안가도 그를 믿고 따르죠. 이때 이 하인은 주인을 이해할 수 없는 경우가 생기는 것입니다. 하지만 이런 하인의 믿음은 ‘덮어놓고 믿자’가 아닙니다. 그는 주인이 늘 올바른 일을 하고 있다는 것을 이미 이해하고 있기 때문이죠. 

 성령께서는 우리에게 믿음의 분량 만큼만 복음을 알려 주십니다. 그 주신 분량에 맞게 우리는 예수님을 이해할 수 있죠. 그것으로 믿음(앎)이 생기게 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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