사도행전(완료)

행13:43-52(22.08.12.금)

은혜바라기 2022. 8. 12. 08:41

회당의 모임이 끝난 후에 유대인과 유대교에 입교한 경건한 사람들이 많이 바울과 바나바를 따르니 두 사도가 더불어 말하고 항상 하나님의 은혜 가운데 있으라 권하니라
그 다음 안식일에는 온 시민이 거의 다 하나님의 말씀을 듣고자 하여 모이니
유대인들이 그 무리를 보고 시기가 가득하여 바울이 말한 것을 반박하고 비방하거늘
바울과 바나바가 담대히 말하여 이르되 하나님의 말씀을 마땅히 먼저 너희에게 전할 것이로되 너희가 그것을 버리고 영생을 얻기에 합당하지 않은 자로 자처하기로 우리가 이방인에게로 향하노라
주께서 이같이 우리에게 명하시되 내가 너를 이방의 빛으로 삼아 너로 땅 끝까지 구원하게 하리라 하셨느니라 하니
이방인들이 듣고 기뻐하여 하나님의 말씀을 찬송하며 영생을 주시기로 작정된 자는 다 믿더라
주의 말씀이 그 지방에 두루 퍼지니라
이에 유대인들이 경건한 귀부인들과 그 시내 유력자들을 선동하여 바울과 바나바를 박해하게 하여 그 지역에서 쫓아내니
두 사람이 그들을 향하여 발의 티끌을 떨어 버리고 이고니온으로 가거늘
제자들은 기쁨과 성령이 충만하니라


 어제부로 바울의 설교 묵상이 끝났습니다. 오늘은 복음이 이 세상이 뿌려질 때 그것을 받는 자들과 버리는 자들로 나누어지는 현상에 대한 묵상입니다. 어제 마지막 바울의 설교의 가장 끝 부분이 ‘심판은 복음을 알려줘도 믿지 않는 것’으로 끝났죠. 그리고 바로 이어서 오늘 묵상은 그 말씀이 그대로 실현된 현장입니다. 

 바울과 바나바는 예수님과 성령님의 상징입니다. 그래서 이들을 따른다는 표현은 예수님과 성령님의 인도하심을 따른다는 것을 가리킵니다. 성경을 잘 이해하셔야 합니다. 하나님은 성경 안에 말씀을 기재하실 때 단 한글자도 낭비하시지 않는다는 것을 아셔야 합니다. 그리고 성경의  한 글자, 한 획은 오직 복음만을 설명하고 있다는 것을 아셔야 합니다.

 

 그리고 바울과 바나바가 예수님과 성령님의 상징으로 표현되었다는 것은 그들이 ‘이 장면’에서 예수님과 성령님의 역활을 맡았다는 것이지 그들 자체가 항상 예수님과 성령님의 상징이라는 말이 아닙니다. 어렵나요? 

 다윗은 예수님의 상징으로 많은 장면에서 그 역활을 하고 있죠. 그러나 100%는 아닙니다. 다윗은 때로는 간음, 살인, 거짓말을 하는 죄인의 역할로도 등장합니다. 하나님이 성경에서 어떤 인물을 사용하실 때 그 자를 복음을 설명하기 위해서 사용하시는데 때로는 예수님의 상징으로도, 때로는 죄인의 상징으로도 사용하십니다. 그러나 인과율을 좋아하는 이 세상에서는 ‘그런 식의 해석이 어디있어! 내로남불(내가 하면 로멘스 남이 하면 불륜)이구먼~~~’ 이라는 비판을 합니다. 맞습니다. 사실 성경은 인간의 논리에서 벗어나서 하나님 기준으로 그 분 마음대로 해석을 한 책입니다. 그래서 하나님이신 성령께서 오셔서 가르치셔야만 해석이 가능하게 해 놓으셨죠. 

 이렇게 예수님과 성령님으로 상징되는 바울과 바나바를 따른 자들을 ‘경건한 사람들’이라고 칭하고 있습니다. ‘경건’이 뭘까요? 경건의 뜻이 바로 ‘분리’입니다. 복음을 알아듣는 사람들도 이 세상을 살면서 늘 인본주의에 다시 묶이곤 하죠. 즉, ‘잘살기’에 몰두합니다. ‘행복하기’에 몰두하죠. 그러나 성령께서 오셔서 복음을 다시 조명하시면 그때서야 비로서 복음의 안경을 쓰고 세상을 다시 바라보게 됩니다. 이렇게 복음의 안경을 쓰고 다시 세상을 바라보면 그 동안 다른 길을 보고 있던 나와 분리됩니다. 이렇게 분리되는 때를 ‘경건’이라고 합니다. 

 그래서 바울의 설교 이후 경건한 사람들이 이 두사람을 따른다고 나와 있죠. 그리고 바울은 이런 사람들에게 '하나님의 은혜 가운데 있으라'고 합니다. ‘하나님의 은혜’의 정체는 뭐죠?  바로 예수님입니다. 예수님의 핵심 정체성이 바로 하나님의 은혜죠. 그래서 이 말씀은 바로 인본주의와 분리된 경건한 사람들은 예수님의 지체로 남아 있게 된다는 것을 가리킵니다. 

 하지만 45절에 보면, 유대인들이 그 무리를 보고 시기가 가득하여 바울을 반박하고 비방을 하죠. 이들이 시기를 하는 이유는 44절 보면 온 시민이 거의 다 바울과 바나바 쪽으로 모였기 때문입니다. 즉, 교회가 복음은 보지 못하고 오직 교회의 성장(교회의 건물, 성도의 수, 재정, 프로그램, 교회의 인간관계)에 관심이 있기 때문에 오는 감정을 나타냅니다. 

 이런 자들에게 바울은 ‘너희는 복음을 버리고 영생을 얻기에 합당하지 않은 자로 자처한 자’로 선언하죠. 그래서 바울은 '나는 이방인에게 향한다'라고 선언을 하게 되죠. 여기서 나온 이방인의 참 뜻은 ‘이 세상에 속하지 않은 자’ 즉, 선택된 자를 뜻합니다. 

 47절 보면, 주께서 이같이 우리에게 명하시되, ‘내가 너(바울)를 이방의 빛으로 삼아 너로 땅 끝까지 구원하게 하리라’고 나옵니다. 이렇게 바울을 ‘빛’으로 여기시는 이유는 지금 이 말씀은 바울이 말하는 것이 아니라 예수님의 이야기를 하고 있는 것이기 때문입니다. (땅 끝이라는 말도 지구 곳곳이라는 뜻이 아니라 '선택된 백성이 있는 그 어떤 곳이라도'라는 뜻입니다.)

 사도행전 서론에 말씀드렸듯이, 사도행전은 복음의 주인공인 예수님께서 이 땅에서 승천한 이후 주인공 없는 책인 성경을 만들어가기 위해서 그 주인공의 역활을 ‘사도’라는 사람들로 지정해서 성경을 만들어가는 과정입니다. 그래서 우리는 그 배우에 주목하면 안 되고 그 역할(예수님의 역할)에 주목해야 합니다. 

 48절을 보면 중요한 대목이 또 나오죠. ‘영생을 주시기로 작정된 자는 다 믿더라’입니다. 직접 예정론이 언급되어 있습니다. 즉, 복음을 알게 됨(믿음)은 바로 하나님의 작정함(예정)이라는 것입니다. 반대로 이야기를 하면, 우리가 복음을 알게 된 것 그 자체가 바로 구원을 받았다는 증거입니다. 이것을 매우 잘 표현한 유명한 구절이 있죠. 

 “히11:1 믿음은 바라는 것들의 실상이요 보이지 않는 것들의 증거니”
 
 기독교에서 가장 많은 오해가 있는 단어가 바로 ‘믿음’입니다. 일반적으로 말하는 ‘믿음’은 기독교 뿐 아니라 세상 사람들도 다 가지고 있죠. 즉, 아들이 엄마를 ‘믿는다.’는 것도 믿음입니다. 신뢰의 감정이죠. 그리고 스스로 그 신뢰하는 것에 집중합니다. 

 아들은 어떻게 엄마를 신뢰를 할까요? 바로 엄마가 나를 사랑한다는 것을 알기 때문입니다. 그렇다면 엄마가 나를 사랑한다는 것을 어떻게 알죠? 수 많은 세월을 통해 엄마를 보고, 만지고, 느끼고, 경험하면서 알았기 때문입니다. 

 똑같은 의미로 우리가 예수님을 믿는 것은 그 분을 ‘알게 됨’이 전제되어야 합니다. 그 분의 정체성을 정확히 알게 되어야 우리는 그 분을 믿을 수 있게 되는 것이죠. 그런데 대부분의 기독교에서는 그 분을 잘 모릅니다. 신기하게도 모르고 믿는 것을 오히려 그들은 더 최고의 믿음이라고 최면 혹은 자기암시를 하면서 신앙생활을 하죠.  

 예수님의 정체성은 단순히 ‘나를 위해 십자가에서 죽으셨데~~’정도로 설명될 수가 없습니다. 그 분의 정체성은 복음의 주인공입니다. 그리고 하나님께서는 그 복음을 설명하기 위해 천지창조를 하셨고 방대한 성경을 만드셨죠. 그리고 인류의 모든 역사에 섭리하시면서 복음의 역사를 이끌고 오셨죠. 그런데 이 모든 것이 바로 예수님의 정체성을 설명하는 것입니다. 그리고 이것은 모두 숨겨져 있다고 성경에 나옵니다. 요한계시록에서 ‘봉인되어 있다.’는 표현으로 나오죠. 그리고 그렇게 봉인되어 있는 것을 선택된 자들을 위해 ‘봉인을 뗀다’고 나옵니다. 예수님께서도 복음서에서 직접적으로 말씀을 하셨죠. 

 “마13:10-11 제자들이 예수께 나아와 이르되 어찌하여 그들에게 비유로 말씀하시나이까? 대답하여 이르시되 천국의 비밀을 아는 것이 너희에게는 허락되었으나 그들에게는 아니되었나니”

 결국 믿음의 정체는 '믿음이라는 감정에 집중해서 그 감정을 키우는 것'이 아니라  ‘본질을 알게 됨’입니다. 즉, 예수님의 참 정체성을 알게 되는 것이 본질이며, 이 본질을 알게 되면 자연스럽게 ‘믿음(앎)’이라는 결과물이 드러나죠. 

 이제 왜 믿음이 바라는 것들의 실상이요 보이지 않는 것들의 증거인지 아셨죠? 다시 한번 이 말씀을 요약해드리면, (믿음을 앎으로 고쳐서 말씀드리면) 예수님의 정체성을 알게 된 것이 바로 내가 구원받은 증거라는 말씀입니다. ‘믿음’이라는 결과물이 중요한 것이 아닙니다. 그 ‘믿음’이라는 결과물을 나오게 한 ‘본질을 알게 됨’ 즉, 복음을 알게 됨, 즉 예수님의 정체성을 알게 됨이 핵심입니다. 

 그런데 이것은 성령께서 오직 선택된 자들에게만 알려주신다고 예수님이 선언하셨죠. 이 두 가지 큰 복음의 속성을 명심하시기 바랍니다. 

 

 그렇다면 난 아직 복음을 잘 모르겠는데 어떻게 해야하는가? 내가 할 것이 무엇일까? 없습니다. 그냥 '기다리는 것' 그게 전부입니다. 이스라엘 백성이 광야에서 할 수 있는 것은 오직 '기다리는 것'이 전부였죠. 단지 이 부분에서 예수님께서 한가지 힌트를 주셨죠. 

 

 "마15:27-28 여자가 이르되 주여 옳소이다마는 개들도 제 주인의 상에서 떨어지는 부스러기를 먹나이다 하니 이에 예수께서 대답하여 이르시되 여자여 네 믿음이 크도다 네 소원대로 되리라 하시니 그 때로부터 그의 딸이 나으니라"

 

  이 말씀은 복음에 대한 열망에 대한 이야기입니다. 개가 땅에 떨어진 부스러기라고 먹고자 하는 열망을 가지고 기다리라는 것입니다. 이것이 유일한 힌트입니다. 

 

  ( 사실 이 열망도 내가 할 조건이 될 수가 없습니다. 그 이유는 이 열망 자체도 선택된 자들에게만 성령께서 주시기 때문입니다.  유기된 자들은 절대 복음에 대한 열망을 품지 못합니다. 그대가 복음에 대한 열망을 품게 되었나요? 그렇다면 이제부터는 '기다림'의 시간 뿐입니다. 거룩한 고민의 시간만이 남아있죠. 이것이 참 인생의 모습입니다. )

 

     ******************* 다음 한 주간은 여름방학을 하겠습니다. *******************

    ************  8월15 - 21 [ 묵상방학 ]  8월22일 월요일에 뵈요*****************

 

 


  P.S 매주 금요일은 전도에 대한 반복 메시지를 올려 드립니다. 사명이라고 생각하지는 마시고 그냥 살아가시다가 "마음이 가난한 자"가 눈에 들어오면 이 묵상을 권해 주세요. "때를 얻든지 못 얻든지" 전파해 주세요.(그러나 이 뜻은 '아무 때나 무조건‘ 전하라는 말이 아닙니다. 이 말도 행위로 파악하여 책임감에 어깨가 짖 눌리신 분들이 많죠. 이 말은 "전도는 인본주의를 고려하지 말라"는 뜻입니다. )

 전도는 설득이 아닙니다. 복음은 설득과 이해로 알 수 있는 것이 아니기 때문입니다. 전도는 '잃어버린 양을 찾는 것'입니다. 잃어버린 양들의 모습은 매우 동일합니다. 길을 잃어 버려서 마음이 가난해져서 애통한 상태죠. 즉, 삶(인생과 신앙)의 가치를 잃고 애통한 상태에 놓여 있죠. 그런데 이 모습이 바로 '복된 모습'입니다. 복음(복)을 받을 수 있는 유일한 모습이기 때문입니다. 

 많은 교인들이 듣기 좋은 설교, 외롭지 않은 교회 활동, 나의 가치를 높이는 봉사와 기부활동을 통해 '신앙생활' 이라는 것을 하지만 잃어버린 양들은 '참 예수님'을 만나기 전까지 늘 마음 한구석에 '텅 빈 가난함'을 인식하죠. 교회 안에서, 성경을 읽으면서 늘 모순됨을 인식합니다. 그들은 어느 순간 막혀 있는 곳에서 길을 잃어 버립니다. 

 주위에 이런 분들이 눈에 들어 온다면 이 묵상을 권해 주세요. 반대로 마음이 부유한 자들을 설득하려 하지 마세요. 마음이 부유한 자들이란 사회에서, 교회에서 자신의 가치를 쌓아가는 자들입니다.(물론 그들 중에서는 마음 깊은 곳에서 가난함을 인식하는 자들도 있겠죠) 그들에게 그 가치를 부인하고 오직 예수님의 가치만을 알리는 것은 불가능합니다. 자신의 가치와 예수님의 가치가 충돌하죠. 그리고 다시 한번 예수님을 살인(부인)합니다. 그리고 그것을 전달하는 여러분을 박해(오해)하죠. 이것은 누구도 예외가 없습니다. 이것이 가장 살벌하게 일어날 수 밖에 없는 관계가 부모와 자식, 형제와 형제 즉, 가족입니다. 사랑하기에 때릴 수 밖에 없는 관계라고나 할까요!!

 오직 삶(인생과 신앙)의 가치를 잃어버린 여러분의 참 형제를 찾아 이 글을 권해주세요. 그들이 결국 영원한 천국에서 여러분의 참 형제요, 자매가 되실 분입니다. 그 날을 생각해 보세요^^

 주말과 공휴일은 묵상이 없습니다. 친구, 가족과 재미있게 잘 보내시고 다니는 교회에서 하나님의 음성을 잘 듣도록 기도하세요. 재미있게도 눈을 뜬 자들은 어떠한 이단목사의 설교를 통해서도 복음으로 가공해서 해석할 수가 있다는 것입니다. 이것을 예수님이 이렇게 말씀하셨죠. “그들의 행위는 본 받지 말고 그들이 하는 말은 잘 지켜라 ” 어떠한 기독교 이단이라도 성경말씀을 전파하는 통로로 하나님은 사용합니다. 이 말은 어떠한 정통교회 목사라도 이단적 발언은 항상 존재한다는 말이죠. (저의 묵상을 포함해서 모든 가리키는 손가락들은 진리가 아닙니다. 오직 말씀이 가리키는 목표인 예수님을 볼 수 있어야 합니다.)

( 홈페이지 처음에 보면, 지난 묵상과 특별 묵상이 포스팅되어 있습니다. 시간 나실 때 마다 계속 보시면서 묵상하세요.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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