이에 이고니온에서 두 사도가 함께 유대인의 회당에 들어가 말하니 유대와 헬라의 허다한 무리가 믿더라
그러나 순종하지 아니하는 유대인들이 이방인들의 마음을 선동하여 형제들에게 악감을 품게 하거늘
두 사도가 오래 있어 주를 힘입어 담대히 말하니 주께서 그들의 손으로 표적과 기사를 행하게 하여 주사 자기 은혜의 말씀을 증언하시니
그 시내의 무리가 나뉘어 유대인을 따르는 자도 있고 두 사도를 따르는 자도 있는지라
이방인과 유대인과 그 관리들이 두 사도를 모욕하며 돌로 치려고 달려드니
그들이 알고 도망하여 루가오니아의 두 성 루스드라와 더베와 그 근방으로 가서
거기서 복음을 전하니라
오늘의 묵상은 두 사도 바울과 바나바가 이고니온에서 복음을 전하는 것으로 출발합니다. 두(2) 사도의 ‘2’는 증거의 숫자입니다. 성경에서 하나님께서 즐겨 사용하시는 숫자입니다. 확정, 증거, 고집을 사용하실 때 ‘2’라는 숫자를 사용하여 표현하시죠. 유일하신 하나님의 숫자 1에 2를 더하면 성부성자성령 3위일체 하나님으로 확정이 되죠. 3위일체 하나님에 2를 더하면 5라는 말씀(모세오경)의 숫자가 되죠. 즉, 하나님을 말씀으로 증거한다는 말입니다. 5라는 말씀(복음)에 2를 더하면 7이라는 천국으로 확정이 됩니다. 그런데 4라는 땅을 2로만 고집하면 6이라는 인본주의가 확정이됩니다.
재미있죠? 숫자 조차도 복음을 설명하기 위해 이 땅에 하나님이 허락하신 시스템입니다. 수학을 전공하는 자들에게 수학의 본질을 물으면 수학은 단순히 계산하는 것이 아니라 우주를 설명하고 있다는 이야기를 합니다. 그런데 복음에 눈을 뜬 자들은 숫자는 우주 뿐만 아니라 영적 세상인 복음까지도 설명하고 있다는 것을 알게 되죠.
두 사도가 복음을 전하니 이고니온에서도 두 무리로 나누어 집니다. 오늘의 초점은 바로 ‘심판’입니다. 이렇게 복음을 전할 때 그것을 알아 듣는 자들과 못 알아 듣는 자들로 나누어 지는 것이 바로 ‘심판’이라는 것을 성령께서 설명하고 있는 것입니다.
3절 후반의 표현법을 자세히 보셔야 합니다. ‘주께서 그들의 손으로 표적과 기사를 행하게 하여 주사 자기 은혜의 말씀을 증언하시니’라고 되어있죠? 이 문장을 조금 더 정밀하게 몇 번씩 읽어 보세요. 이 글의 주체는 그들(바울과 바나바)이 아닙니다. 그들은 도구입니다. 물론 표적과 기사도 도구에 불과하죠. 이 글의 주체는 바로 ‘주(예수 그리스도)’입니다. 이 문장의 강조점은 뒤쪽에 나와 있는 ‘자기 은혜의 말씀을 증언하시니’입니다. 그들이 증언하는 것이 아니라 주께서 직접 자기 은혜를 증언하신다고 표현이 되어 있죠.
인간이 인본주의에 묶여서 성경을 읽다 보니 자꾸 바울과 바나바로 초점을 가져가므로 성령께서 일부러 이런 표현법을 사용하고 계시다는 것이 이해가 가시나요? 바울과 바나바나 표적이나 기사 모두 도구일 뿐이라는 것을 잘 이해하셔야 합니다.
이것은 교회에서도 마찬가지입니다. 교회에서 인간의 영향력이 커지는 것은 매우 경계해야 합니다. 특히 지도자들은 때 때 마다 뒤에서 모든 것을 조율하시는 성령의 복음의 가르침을 강조해야 합니다. 조금 싼 티 나게 표현하면 초치는 말을 하라는 것이죠. 즉, 교회에서 인격적으로 휼륭한 사람이 칭찬 받을 때 그 사람에게 ‘그것은 위선이야~~’ 라고 할 수 있어야 합니다. (지금 저는 매우 싼 티 나는 표현법으로 본질을 설명하는 중입니다. ^^)
이때 이렇게 ‘당신은 위선자야~~~’라고 지적 받은 사람의 태도는 어떨까요? 대부분 그 지도자를 욕하겠죠. 원수가 됩니다. 그것이 바로 오늘 말씀 2절입니다. ‘순종하지 아니하는 유대인들이 이방인들의 마음을 선동하여 형제들에게 악감을 품게 하거늘’입니다.
‘솔직히 이렇게 지적하는데 어느 누가 악감을 안 품을 수가 있나요? ’ 맞습니다. 불가능합니다. 그런데 성령께서 선택된 자들에게 오셔서 복음의 입김으로 가르치면 신기하게도 그들은 그것을 복음으로 알아 듣죠. 이것을 설명하기 위해 하나님께서 행하신 에피소드가 바로 다윗의 밧세바 강간 사건입니다.
다윗은 자신의 부하 우리아의 아내를 강간하고 우리아를 죽이고 부하들을 속이고 거짓말 하죠. 십계명을 전부 다 어겨 버립니다. 하나님께 평생 충성했던 사람치곤 이해가 안 가는 행동이죠? 그러나 복음을 설명하기 위해 하나님께서 잠시 그 사람에게 손을 놓으시면 이런 행동은 누구나 할 수 있습니다. (그러니 남을 비판하지 마세요)
이런 다윗에게 나단 선지자가 와서 다윗에게 그의 행위를 비유로 설명하면서 거센 비판을 하죠. 그런데 다윗은 그 비판을 정확히 인지하고 다시 복음을 보게 되죠. 이것을 회개라고 합니다. 회개의 본질은 반성이 아니라 ‘다시 복음을 보게 됨’이 회개의 본질입니다.
이후 4절이 바로 심판의 정의입니다. ‘그 시내의 두 무리가 나뉘어 유대인을 따르는 자도 있고 두 사도를 따르는 자도 있는지라’
교회에 가면 구원받은 것이 아닙니다. 교회에 가서 최종적 심판대에 서게 되는 것이 더 합리적인 해석입니다. 교회에 가면 오히려 ‘교회를 따르는 자’ 와 ‘예수님을 따르는 자’로 나뉘게 되죠. 이것을 예수님이 정확히 설명하시 비유가 ‘천국 그물 비유’입니다. 천국은 그물을 던져서 고기를 모은 후 좋은 고기와 나쁜 고기를 나누는 것이라고 말씀하셨죠.
이런 비판과 박해를 오늘 말씀 5절에서도 합니다. ‘두 사도를 모욕하며 돌로 치려고 달려드니’라고 표현이 되어 있습니다. 이후 두 사도는 도망하여 루가오니아에서 복음을 전하죠.
여기서도 인본주의 시각을 버려야 합니다. 여기서 만약 ‘두 사도를 돌로 치려고 달려드니 성령께서 번개를 쳐서 그 유대인들을 죽였더라.’ 로 전개가 되었다면 두 사도는 거기서 더욱 더 복음을 외치는 장면으로 이어지겠죠. 그러나 오늘 말씀은 두 사도가 도망치는 것으로 전개가 이어갑니다.
성경을 해석할 때 늘 준비해야 할 것 중에 하나가 바로 인간의 기준에서의 ‘인과율’을 언제라도 버릴 준비가 되어 있어야 한다는 것입니다. 성령께서 루스드라로 바울을 보내신 이유는 이 루가오니아의 루스드라에 있는 ‘발을 쓰지 못하는 자’의 에피소드를 준비하고 계시기 때문입니다. 이 에피소드를 통해 복음을 설명하려는 계획을 가지고 있으신 것이죠. 그래서 표적과 기사를 행하고 있는 두 사도를 돌로 맞을 뻔 하게 이끌고 가신 것입니다. 그래야 비겁하게 도망하기 때문입니다.
교회에서 내가 표적과 기사를 막 행하고 사람들이 나를 따르고 박수 치면 그곳에서 뒤돌아서 떠나갈 사람이 존재할 것 같습니까? 아니겠죠. 오직 인간의 영향력만 커지면서 복음을 퇴색이 됩니다.
이제 아시겠죠? 오직 복음은 성령께서 전파하시고 그 분의 열심으로만 진행되는 것입니다. 이것이 사도행전의 가장 큰 초점입니다.
끝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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