어떤 사람들이 유대로부터 내려와서 형제들을 가르치되 너희가 모세의 법대로 할례를 받지 아니하면 능히 구원을 받지 못하리라 하니
바울 및 바나바와 그들 사이에 적지 아니한 다툼과 변론이 일어난지라 형제들이 이 문제에 대하여 바울과 바나바와 및 그 중의 몇 사람을 예루살렘에 있는 사도와 장로들에게 보내기로 작정하니라
그들이 교회의 전송을 받고 베니게와 사마리아로 다니며 이방인들이 주께 돌아온 일을 말하여 형제들을 다 크게 기쁘게 하더라
예루살렘에 이르러 교회와 사도와 장로들에게 영접을 받고 하나님이 자기들과 함께 계셔 행하신 모든 일을 말하매
바리새파 중에 어떤 믿는 사람들이 일어나 말하되 이방인에게 할례를 행하고 모세의 율법을 지키라 명하는 것이 마땅하다 하니라
사도와 장로들이 이 일을 의논하러 모여
많은 변론이 있은 후에 베드로가 일어나 말하되 형제들아 너희도 알거니와 하나님이 이방인들로 내 입에서 복음의 말씀을 들어 믿게 하시려고 오래 전부터 너희 가운데서 나를 택하시고
또 마음을 아시는 하나님이 우리에게와 같이 그들에게도 성령을 주어 증언하시고
믿음으로 그들의 마음을 깨끗이 하사 그들이나 우리나 차별하지 아니하셨느니라
그런데 지금 너희가 어찌하여 하나님을 시험하여 우리 조상과 우리도 능히 메지 못하던 멍에를 제자들의 목에 두려느냐
그러나 우리는 그들이 우리와 동일하게 주 예수의 은혜로 구원 받는 줄을 믿노라 하니라
오늘의 묵상은 매우 간단한 주제를 가지고 있습니다. 바로 ‘할례’입니다. 그런데 성경은 이 부분을 매우 많은 지면을 할애하여 다루고 있죠. 이것은 하나님께서도 매우 중요하다고 생각하시고 있다는 뜻입니다.
오늘의 줄거리는 매우 쉽습니다. 이방인들도 구원을 받게 되었는데 과연 ‘그들도 할례를 받아야 하나?’ 입니다. 이 주제를 가지고 예수살렘에서 엄청난 토론을 하게 됩니다. 그런데 하나님께서는 왜 이 장면을 이렇게 중요하게 다루셨을까요? 바로 그 이유는 지금 이 글을 읽는 분들 중에서 선택된 분들이 계시고 그 분들이 복음의 눈을 뜨게 되면 그때부터 약간의 ‘혼란’이 오기 때문입니다.
이 분들이 복음의 눈을 뜨기 전에는 그냥 교회에서 시키는 대로, 교회의 질서대로 , 교회의 프로그램에 맞추어 신앙생활을 했었겠죠. 그런데 복음의 눈을 뜨면 이 모든 것의 본질을 보게 됩니다. 오직 복음은 예수님만 소망하는 것인데 교회의 많은 규칙과 질서들이 오히려 이것을 막고 있다는 것을 알게 되죠. 하나님은 오늘 묵상에서 이것을 다루시고 있는 것입니다.
오늘 이 ‘갈등’의 시작은 1절 ‘어떤 사람들이 유대로 부터 내려와서’로 시작합니다. 이 구절의 느낌이 보이시나요? 성경이 주는 느낌은 바로 ‘정체성을 알 수 없는~~ 단지 유대에 소속에 어 있는~~~’입니다. 즉, 교회의 질서, 규칙, 프로그램은 분명한데 도무지 그 정체성을 알 수 없다는 것이 이 갈등의 시작을 알리는 인트로입니다. 즉, 이것이 하나님으로부터 기인한 것이지 아니면 사람의 영향력으로 기인한 것인지 그 정체를 알 수 없다는 것을 가리킵니다. 교회의 성장이 인간의 영향력 때문인지 혹은 하나님으로 기인한 것인지 알 수 없다는 것이죠. 그래서 인트로가 '(정체를 알 수 없는) 어떤 사람들이 유대에서부터 내려와서~~' 입니다. 성경 참 재미있고 섬세하죠?
이렇게 정체를 알 수 없는 어떤 유대인들이 이렇게 말하죠. ‘너희가 모세의 법대로 할례를 받지 아니하면 능히 구원을 받지 못하리라’고 합니다. 복음의 눈으로 보면 ‘거짓말’이 분명하죠. 그런데 이것을 두고 2절에서 갈등과 다툼 그리고 변론이 일어납니다.
불과 몇 십 년 전 과거의 교회에서도 복음성가를 찬송가로 불러도 되는가? 예배시간에 박수를 쳐도 되는가? 헌금 바구니를 돌려야 하는가? 별의별 갈등과 다툼 그리고 변론이 있었죠. 오늘 묵상의 방향성을 잘 잡으셔야 합니다. 할례, 복음성가, 박수, 헌금바구니 같은 행위가 오늘의 방향성이 아닙니다. 교회의 모든 질서 (심지어 일요일 11시 대예배 조차)의 의미 없음이 방향성입니다. 그래서 사실 쉬운 주제가 아니죠. 잘 따라오세요.
일단 할례 그 차제에 대한 묵상을 먼저 해보죠. 하나님께서 아브라함에게 그 자손을 통해 복을 주겠다는 약속을 한 직 후 처음으로 할례가 시작되었죠. 할례는 남자의 성기를 자르는 것입니다. 물론 상징이기 때문에 실제로는 성기 끝의 표피만 자르죠. 그러나 그 본질은 남자의 성기를 자르는 것입니다. 즉, 육체의 자손을 인정하기 않겠다는 뜻이죠.(번성조차 인간의 노력을 인정하지 않는다는 뜻입니다.) 그런데 하나님께서는 이런 할례 직전에 아브라함에게 ‘그 자손에게 복을 주겠다.’고 언약을 하셨죠. 즉, 할례를 해서 자손 번성을 하지 말아라.(의미상) 그래야 그 자손에게 복을 주겠다는 말씀입니다. 완벽한 모순입니다. 그래서 역설적이게도 이 자손은 정확하게 ‘예수님’을 가리킨다는 것을 하나님께서 가르치고 있는 것입니다. 그래서 예수님은 인간 남자로 인해 잉태되지 않고 (할례로 인해~~~) , 즉 남자 없이 탄생한 것입니다. 할례 그 자체도 결국 ‘예수님’의 속성을 해석하는 표지판인 셈이죠. 엄청나죠?
그런데 이런 할례의 본질은 까마득하게 잊어버리고 오직 그 ‘행위’ 지키기에 몰두하여 할례를 받아야 구원을 받는다는 잘못된 신앙을 가진 자들이 바로 유대인들입니다. ( 다시 한번 방향성을 잘 인식하세요. 지금 할례만의 이야기가 아닙니다. 교회 모든 신앙생활이 무가치하다는 큰 관점에 대한 이야기입니다. - 그렇다고 모든 신앙생활을 버리라는 말이 아닙니다. ( 모든 신앙생활을 끊어내자라는 방향성은 영지주의 이단입니다.) 당시 이스라엘에서 할례의 위치는 지금 현대 교회의 일요일 11시 예배보다 아득하게 높은 위치를 차지하는 규례였습니다. 그래서 하나님께서는 모든 신앙생활을 대표하여 지금 할례를 철저하게 깨고 있는 것입니다.
이 갈등의 결론을 베드로가 7-11절에서 정리합니다.
가장 초점되는 구절은 10절 하반절이죠. ‘우리도 능히 메지 못하던 멍에를 제자들의 목에 두려느냐’ 즉, 하나님께서는 신앙생활의 대표로 규정된 할례를 예를 들어서 우리의 모든 신앙생활이 우리의 멍에가 된다는 것을 이야기하고 계시는 것입니다.
즉, 할례를 받아야 한다는 것의 본질은 그 할례가 가리키고 있는 예수님의 탄생, 즉 예수님을 통해서만 구원(번성)을 받는다는 것을 가리키는 것입니다. 그렇듯이 우리의 신앙생활도 그 본질인 예수님의 복음을 듣지 못하면 그것은 ‘멍에’가 되는 것일 뿐입니다.
그렇다고 신앙생활 자체를 끊고 멀리하라는 말이 아닙니다. 성경 말씀 한 구절을 가지고 예를 들어 보죠.
“마5:40 또 너를 고발하여 속옷을 가지고자 하는 자에게 겉옷까지도 가지게 하며 ” (원래 이 말씀의 뜻은 말씀 속에 들어 있는 진짜 본질인 복음을 알려주라는 뜻입니다. )
이 말씀에 문자적으로 순종해서 옆집에서 우리 집에 와서 의자 한 개를 빌려달라고 하니 조금 비약해서 ‘그냥 우리 집도 가지세요~~~’라는 실천을 할 수 있을까요? 하나님은 이것을 ‘멍에’라고 가르치는 것입니다. 여기까지는 이해하실 것입니다. 그렇다고 해서 이렇게 성경 말씀이 멍에가 되므로 ‘성경 말씀을 버리자’의 결론으로 가는 것이 옳을까요? 그것도 아니겠죠.
오늘의 말씀 안에 있는 비밀은 말씀의 본질인 복음을 취하고 그 형식인 멍에에 얽매이지 말라는 것이 하나님께서 우리에게 주신 가르침입니다. 우리의 모든 신앙생활은 전부 다 ‘멍에’입니다. ‘아닌데~~ 나는 신앙생활을 하면서 마구 마구 신나던데~~~’라고 하시는 분들을 그 신앙생활을 통해서 ‘나의 가치 쌓기’를 하고 계시는 것입니다. 교회를 통해서 재산을 쌓는 목사가 있다면 그는 신앙생활이 무척 신나겠죠? 교회를 통해서 나의 찬양 목소리가 박수받는다면 신나겠죠? 교회를 통해서 나의 많은 헌금이 공헌되고 그것을 인정받게 되면 신나겠죠? 결국 이것은 하나님이 원하시는 기독교가 아닙니다. 그냥 인간이 만들어나가는 '종교'일뿐입니다. 그래서 인본주의 종교라고 하죠.
결론입니다. 사실 구원은 할례와 상관없이 이루어 집니다. 즉, 신앙생활의 여부과 상관없이 이루어집니다. 하지만 신앙생활은 몰라도 그 본질인 예수님을 아는 것은 구원의 필수 요소입니다. 다시 말하면, 신앙생활을 잘하던, 엉터리로 하던 아무 상관은 없지만 그 속에 들어 있는 본질인 예수님의 정체성은 정확히 알고 있어야 구원을 받게 됩니다. 베드로는 이것을 11절 결론으로 이야기하면서 끝마치죠.
할례를 안 받아도(신앙생활의 여부와 상관없이) 예수님의 정체성을 알게 된 그들은 “행15:11 우리는 그들이 우리와 동일하게 주 예수의 은혜로 구원 받은 줄을 믿노라”
끝
p.s
( 홈페이지 처음에 보면, 지난 묵상과 특별 묵상이 포스팅되어 있습니다. 시간 나실 때 마다 계속 보시면서 묵상하세요. )
매주 금요일은 전도에 대한 반복 메시지를 올려 드립니다. 사명이라고 생각하지는 마시고 그냥 살아가시다가 "마음이 가난한 자"가 눈에 들어오면 이 묵상을 권해 주세요. "때를 얻든지 못 얻든지" 전파해 주세요.(그러나 이 뜻은 '아무 때나 무조건‘ 전하라는 말이 아닙니다. 이 말도 행위로 파악하여 책임감에 어깨가 짖 눌리신 분들이 많죠. 이 말은 "전도는 인본주의를 고려하지 말라"는 뜻입니다. )
전도는 설득이 아닙니다. 복음은 설득과 이해로 알 수 있는 것이 아니기 때문입니다. 전도는 '잃어버린 양을 찾는 것'입니다. 잃어버린 양들의 모습은 매우 동일합니다. 길을 잃어 버려서 마음이 가난해져서 애통한 상태죠. 즉, 삶(인생과 신앙)의 가치를 잃고 애통한 상태에 놓여 있죠. 그런데 이 모습이 바로 '복된 모습'입니다. 복음(복)을 받을 수 있는 유일한 모습이기 때문입니다.
많은 교인들이 듣기 좋은 설교, 외롭지 않은 교회 활동, 나의 가치를 높이는 봉사와 기부활동을 통해 '신앙생활' 이라는 것을 하지만 잃어버린 양들은 '참 예수님'을 만나기 전까지 늘 마음 한구석에 '텅 빈 가난함'을 인식하죠. 교회 안에서, 성경을 읽으면서 늘 모순됨을 인식합니다. 그들은 어느 순간 막혀 있는 곳에서 길을 잃어 버립니다.
주위에 이런 분들이 눈에 들어 온다면 이 묵상을 권해 주세요. 반대로 마음이 부유한 자들을 설득하려 하지 마세요. 마음이 부유한 자들이란 사회에서, 교회에서 자신의 가치를 쌓아가는 자들입니다.(물론 그들 중에서는 마음 깊은 곳에서 가난함을 인식하는 자들도 있겠죠) 그들에게 그 가치를 부인하고 오직 예수님의 가치만을 알리는 것은 불가능합니다. 자신의 가치와 예수님의 가치가 충돌하죠. 그리고 다시 한번 예수님을 살인(부인)합니다. 그리고 그것을 전달하는 여러분을 박해(오해)하죠. 이것은 누구도 예외가 없습니다. 이것이 가장 살벌하게 일어날 수 밖에 없는 관계가 부모와 자식, 형제와 형제 즉, 가족입니다. 사랑하기에 때릴 수 밖에 없는 관계라고나 할까요!!
오직 삶(인생과 신앙)의 가치를 잃어버린 여러분의 참 형제를 찾아 이 글을 권해주세요. 그들이 결국 영원한 천국에서 여러분의 참 형제요, 자매가 되실 분입니다. 그 날을 생각해 보세요^^
주말과 공휴일은 묵상이 없습니다. 친구, 가족과 재미있게 잘 보내시고 다니는 교회에서 하나님의 음성을 잘 듣도록 기도하세요. 재미있게도 눈을 뜬 자들은 어떠한 이단목사의 설교를 통해서도 복음으로 가공해서 해석할 수가 있다는 것입니다. 이것을 예수님이 이렇게 말씀하셨죠. “그들의 행위는 본 받지 말고 그들이 하는 말은 잘 지켜라 ” 어떠한 기독교 이단이라도 성경말씀을 전파하는 통로로 하나님은 사용합니다. 이 말은 어떠한 정통교회 목사라도 이단적 발언은 항상 존재한다는 말이죠. (저의 묵상을 포함해서 모든 가리키는 손가락들은 진리가 아닙니다. 오직 말씀이 가리키는 목표인 예수님을 볼 수 있어야 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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