유대인들이 안디옥과 이고니온에서 와서 무리를 충동하니 그들이 돌로 바울을 쳐서 죽은 줄로 알고 시외로 끌어 내치니라
제자들이 둘러섰을 때에 바울이 일어나 그 성에 들어갔다가 이튿날 바나바와 함께 더베로 가서
복음을 그 성에서 전하여 많은 사람을 제자로 삼고 루스드라와 이고니온과 안디옥으로 돌아가서
제자들의 마음을 굳게 하여 이 믿음에 머물러 있으라 권하고 또 우리가 하나님의 나라에 들어가려면 많은 환난을 겪어야 할 것이라 하고
각 교회에서 장로들을 택하여 금식 기도 하며 그들이 믿는 주께 그들을 위탁하고
비시디아 가운데로 지나서 밤빌리아에 이르러
말씀을 버가에서 전하고 앗달리아로 내려가서
거기서 배 타고 안디옥에 이르니 이 곳은 두 사도가 이룬 그 일을 위하여 전에 하나님의 은혜에 부탁하던 곳이라
그들이 이르러 교회를 모아 하나님이 함께 행하신 모든 일과 이방인들에게 믿음의 문을 여신 것을 보고하고
제자들과 함께 오래 있으니라
유대인들이 복음을 전하는 바울을 죽기 직전까지 돌로 치고 시외로 끌어 내치는 장면으로 오늘의 묵상을 시작합니다. 왜 하나님이 말리시지 않고 가만히 두었을까? 그 이유는 바로 이렇게 바울이 돌로 맞고 시외로 내치는 장면이 복음을 설명하는데 유익하기 때문입니다.
이 19절이 설명하는 복음의 속성은 복음의 진영으로 들어가게 되면 필연적으로 인본주의의 박해를 받는다는 것과 그들에게서 분리된다는 것을 설명하고 있는 것입니다. 대부분의 기독교인들은 반대로 알고 있죠. 예수님을 잘 믿으면 이 세상에서 더 행복하게 잘 살게 된다는 것으로 믿고 있습니다. 대부분 그런 식으로 지도자들이 설교를 하게 되죠. 그러나 복음의 속성 상 절대 그렇게 될 수가 없습니다.
“마6:24 한 사람이 두 주인을 섬기지 못할 것이니 혹 이를 미워하고 저를 사랑하거나 혹 이를 중히 여기고 저를 경히 여김이라 너희가 하나님과 재물을 겸하여 섬기지 못하느니라”
바울은 여기서 깊은 깨달음이 있었던 것이 틀림없습니다. 이후 22절에 보면 많은 제자들에게 이렇게 말합니다. ‘이 믿음에 머물러 있으라. 우리가 하나님 나라에 들어가려면 많은 환난을 겪어야 한다.’
이 세상 사람들의 인생의 목적은 ‘잘 살기’에 있습니다. 그런데 하나님은 절대 인생을 ‘잘 살기’ 라는 모형으로 만드시지 않았습니다. 우리가 그렇게 바라보는 이유는 나 보다 높은 바벨탑 위에 올라가 있는 사람을 바라보며 ‘희망’을 갖기 때문입니다. 그러나 그렇게 높은 위치에 있는 자들도 똑같이 ‘절망’이라는 것을 가지고 살죠.
인생은 ‘잘 살기’가 목적이 아니라 ‘비참함’을 알게 되는 것이 목적입니다. 우리가 어떠한 노력을 해도 하나님과의 관계가 회복되지 않는 한 ‘비참함’에 머물 수밖에 없다는 것을 80년 동안 깨닫는 것이죠. 그래서 원래는 항상 비참하게 살아야 하는데 하나님이 조금은 견디게 해 주시는 은혜로 말미암아, 즉 맛나의 은혜로 말미암아 행복감을 조금은 맛보죠. 그때마다 감사하게 되는 것입니다. 그렇다고 맛나를 더 많이 모으는 행위는 바로 ‘썩어짐’을 당하게 됩니다. 목적이 전도되기 때문입니다. 기억하세요. 우리의 인생은 ‘비참함’을 알게 되는 것입니다. 그래야 오직 예수님만 소망하게 되는 길을 찾게 되기 때문입니다.
하지만 여기서도 두 가지 길이 발생합니다. 예수님을 찾아서 비참한 인생을 행복한 인생으로 바꾸는 것을 ‘종교’라고 합니다. 그러나 인생은 절대 비참함에서 벗어날 수가 없다는 것을 알게 되어 ‘나를 부인하고 오직 예수님만을 소망하는 것’을 ‘생명’이라고 합니다. 이 두 가지 방향성을 구분할 수 있는 것을 ‘눈을 뜬다.’ ‘거듭난다.’라고 하는 것이죠. 이것은 내 스스로 할 수 있는 것이 아니라 성령께서 예수님의 신부들을 찾아서 눈을 뜨게 하는 것입니다.
이후 바울은 각 교회의 장로들을 택하여 ‘금식 기도’를 합니다. 금식이라는 의미는 ‘인본주의를 끊는 것’을 가리킵니다. 물론 밥을 안 먹고 기도하는 행위를 말하지만 성경은 그런 유치한 행위가 목적이 아닙니다. 이 행위를 통해 복음을 설명하려는 것이죠.
현대 교회에서 말하는 금식 기도의 의미는 밥을 안먹고 기도할 테니 ‘내 사업 잘 되기. 내 자녀 잘 되기. 우리 교회 잘 되기. 내 건강 챙기기’를 떼쓰는 것입니다. 그러나 성령께서 말하는 금식의 본질은 ‘인본주의’와의 분리에 있습니다. 그러나 우리는 오히려 금식을 통해 인본주의 꼭대기를 원하죠. 이것이 ‘종교’의 한계입니다 즉, 눈 먼 자들의 한계죠.
사실 우리의 모든 기도는 참 금식기도의 본질을 담아서 해야 합니다. 즉, 기도할 때는 인본주의 소망을 끊어내고 오직 복음의 양식대로 기도를 해야 하죠. 그래서 기도의 끝에 ‘예수님의 이름’을 걸고 하는 것입니다. 그래서 ‘예수님의 이름으로 기도합니다.’라는 뜻은 ‘예수님이라면 이렇게 기도할 것입니다.’라는 뜻입니다. 그러려면 예수님의 정체성을 정확히 아는 자들만이 기도가 가능하겠죠.
그래서 예수님의 정체성을 모르는 사람들이 단지 '예수님'이라는 세 글자를 기도의 마지막에 붙이는 행위는 '수리수리마수리' '열려라 참깨'의 주문에 지나지 않습니다. 가능한 많은 기도 제목을 가지지 마십시오. 기도 제목을 천천히 읍 쪼리고 나서 '예수님이라면 이것을 기도할 것인가? '라고 검증하십시오. 그리고 나면 내가 할 수 있는 기도가 거의 없다는 것을 알게 됩니다.
그렇게 되면 이제부터가 재미있습니다. 그렇게 검증이 되어서 기도제목이 생겼다면 그 모든 기도제목은 이미 예수님께서 다 이루신 것임을 알게 됩니다. 즉, 기도 제목으로 최종 결정이 되는 순간 이미 다 이루어졌음 혹은 이미 이루어져있었음을 알게 됩니다. ( 이 글을 쓰고 있는 저도 한 가지 기도제목으로 몇십 년을 '예수님이라면???' 을 기도한 적이 있죠. 그리고 마침내 몇십 년의 세월이 흘러 그 기도를 '예수님의 이름으로 이제 이것을 기도할 수 있습니다.'라고 완성을 시킬 때 이미 예수님이 그것을 다 이루신 것이었다는 것을 알게 되었죠. 어떠세요? 참 기독교는 정말 다른 종교죠? 아니 참 생명이죠? )
그런데 이런 모든 과정은 결국 내가 예수님을 알아야 가능합니다. 즉, 예수님의 정체성을 알아야 하죠. 그리고 예수님의 정체성은 그 분이 복음의 주인공이라는 것입니다. 그리고 복음을 다른 말로는 '하나님의 사랑'이라고 합니다. 복음이 우리를 향하신 하나님의 구원 계획, 즉 사랑의 계획이기 때문입니다. 모든 것은 다 이렇게 연결이 되죠. ( 그래서 성경에서 나오는 '사랑'이라는 말을 "복음+전, 후치사"로 바꾸어서 읽게 되면 정확히 해석이 가능합니다. )
그래서 23절 후반절에 보면, 이런 금식기도의 소망(목표)이 나옵니다. ‘그들이 믿는 주께 그들을 위탁하고’ 라고 표현이 되어있죠. 금식기도의 소망이 고난을 피하거나 잘 사는 것이 목표가 아니라 환난이 생길 때 나를 주님께서 위탁하는 것입니다. 이 방향성을 심각하게 생각하셔야 합니다.
이후 여러 전도 여행을 하면서 말씀을 전하는 모습으로 14장을 마치는데, 27절 하반절에 보면, ‘이방인들에게 믿음의 문을 여신 것을’ 이라는 표현이 되어 있습니다. 이방인들이 믿음의 문을 연 것이 아니라 주님께서 그들에게 믿음의 문을 여신 것으로 표현이 되어 있죠. 즉, 모든 구원은 오직 예수님의 기준에서 선택되어 진행이 된다는 것을 의미합니다.
끝