온 무리가 가만히 있어 바나바와 바울이 하나님께서 자기들로 말미암아 이방인 중에서 행하신 표적과 기사에 관하여 말하는 것을 듣더니
말을 마치매 야고보가 대답하여 이르되 형제들아 내 말을 들으라
하나님이 처음으로 이방인 중에서 자기 이름을 위할 백성을 취하시려고 그들을 돌보신 것을 시므온이 말하였으니
선지자들의 말씀이 이와 일치하도다 기록된 바
이 후에 내가 돌아와서 다윗의 무너진 장막을 다시 지으며 또 그 허물어진 것을 다시 지어 일으키리니
이는 그 남은 사람들과 내 이름으로 일컬음을 받는 모든 이방인들로 주를 찾게 하려 함이라 하셨으니
즉 예로부터 이것을 알게 하시는 주의 말씀이라 함과 같으니라
그러므로 내 의견에는 이방인 중에서 하나님께로 돌아오는 자들을 괴롭게 하지 말고
다만 우상의 더러운 것과 음행과 목매어 죽인 것과 피를 멀리하라고 편지하는 것이 옳으니
이는 예로부터 각 성에서 모세를 전하는 자가 있어 안식일마다 회당에서 그 글을 읽음이라 하더라
어제 묵상을 하다가 조금 셋 길로 빠져서 다른 묵상을 하는 통에 1,2부로 나누어서 묵상을 합니다.
어제에 이어 오늘은 19절부터 묵상을 합니다. 야고보가 ‘그러므로 내 의견에는’이라고 시작하죠. 이 문구가 매우 중요한 문구입니다. ‘내 의견’입니다. 즉, 야고보의 의견입니다. 즉, 야고보의 의견이므로 ‘진리가 아니라는 것’을 아셔야 합니다. 그런데 이것을 하나님께서 성경에 기록을 하셨다는 것은 이것을 통해 복음을 설명하려는 것임도 알아야 합니다. 즉, 하나님께서 (선지자 등을 통해) 직접 말씀하신 것과 하나님께서 사람의 의견을 사용하셔서 성경에 기록하신 것은 그 해석 방법이 다릅니다.
일단 야고보는 이렇게 시작하죠. ‘이방인 중에서 하나님께로 돌아오는 자들을 괴롭게 하지 말고’라고 합니다. 전전 묵상에서 설명드린 베드로의 ‘멍에’에 대한 이야기입니다.
우리의 모든 신앙생활로 대표되는 할례를 하나님은 ‘멍에’일 뿐이라고 말씀하셨죠. 야고보는 이것을 더 강조해서 ‘괴롭게 하는 것’이라고 선언하죠.
새벽예배, 각종헌금, 금요철야 이 모든 것은 우리를 괴롭게 하는 것일 뿐입니다. 그렇다고 하지 말라는 말도 아닙니다. 그 행위 자체가 무가치하다는 것입니다. 오직 가치 있는 것은 예수님 한 분뿐이죠. 그런데 이런 ‘멍에’에 묶여 있으면 진정한 가치를 볼 수 없는 상태가 됩니다.
이 부분은 이렇게 설명드릴 수가 있습니다. 물을 먹을 때 종이컵이 꼭 필요하죠. 그렇지만 우리가 종이컵을 먹지는 않죠. 이 종이컵은 결국 사용이 끝나면 용도폐기됩니다. 여기까지가 신학교에서도 많은 사람들이 고민하는 부분입니다. 즉, 그러니 ‘종이컵은 의미 없다.’ 혹은 그러니 ‘종이컵은 반드시 지켜져야 한다.(그래야 물을 먹게 되니)’로 논쟁합니다.
사람들은 이 두 가지 논쟁에서 한 가지 절대 조건을 놓치고 있습니다. 즉, 이 물과 종이컵을 구분할 수 있는가? 없는가?입니다. 대부분의 종교인들은 이것을 절대 구분할 수가 없습니다. 이것은 ‘맹인’이라고 합니다. 이 종이컵 안의 물을 볼 수 있는 사람은 오직 ‘거듭난 자’만 가능합니다. 즉, 성령께서 견인하여 예수님의 지체로 삼은 자입니다. 더 쉽게 말하면 복음을 알게 된 자입니다.
이런 자들은 정확하게 ‘물(복음)’을 볼 수가 있기 때문에 종이컵이 아니라 밥그릇, 비닐봉지, 심지어 쓰레기 봉투에라도 담아서 물을 먹을 수가 있죠. 그러나 ‘맹인’들은, 즉 복음(물)을 보지 못하는 자는 오직 ‘종이컵’만 볼 수 있습니다. 그 안에 좋은 무엇이 들어 있다고 스스로 ‘상상’만 하죠. 즉, 자신이 지어낸 우상들만 존재합니다. 그래서 그들은 종이컵을 극도로 신봉합니다.
이 종이컵이 바로 신앙생활 전체를 가리키는 것입니다. 그리고 지금 우리가 읽고 있는 에피소드에서 나오는 '할례'는 그 신앙생활에서 가장 중요한 위치를 차지하고 있기 때문에 그것을 대표로 뽑아 성령께서 설명을 하고 있는 것입니다. 이 종이컵 안의 물은 복음을 상징하죠. 그래서 복음을 보지 못하는 경우 모든 신앙은 '멍에'가 될 뿐이라는 것입니다.
이 차이는 내가 노력한다고 해서 극복할 수 있는 것이 아닙니다. 이것은 오직 태초에 선택된 자들만 알 수 있도록 예정 것입니다. 즉, 예수님의 일방적인 선택이죠.
말씀으로 돌아가죠. 이후 20절 야고보는 이상한 말을 합니다. ‘우상의 더러운 것과 음행과 목매어 죽인 것과 피를 멀리 하라’는 4가지 지침을 편지하라고 합니다.
야고보는 '할례'라는 규례를 ‘괴롭게 하는 것’으로 선언하였습니다. 그런데 다시 4가지 지침을 내리죠. 모순입니다. 언듯 보면 내로남불입니다. 혹은 자기 합리화일 수도 있습니다. 그래서 우리는 다시 19절로 돌아가야 합니다 19절 보면, 이렇게 시작하죠. ‘내 의견에는~~’입니다.
그래서 하나님께서는 야고보의 4가지 지침을 ‘내 의견’이라는 카테고리에 묶어 놓으신 것입니다. 그렇기 때문에 이 4가지 지침은 진리가 아닙니다 .즉, 이 4가지 지침은 오늘날 교회에서 지켜도 되고 안 지켜도 되는, 즉 종이컵이든, 쓰레기봉투든 상관이 없는 위치에 있다는 것입니다. 그래서 야고보의 ‘내 의견~~’입니다. 어찌 보면, 또 다른 형태의 '할례'가 되는 것이죠. 이것이 야고보의 한계입니다.
그런데 성령께서는 왜 이런 4가지 지침을 굳이 성경에 기록했을까요? 바로 그 안에 복음을 설명할 수 있는 것들이 들어 있기 때문입니다. 즉, 이 4가지의 ‘피해야 할 것’은 이것들이 복음의 어떤 속성을 잘 설명할 수 있다고 성령께서 판단을 하셔서 성경에 기록을 하신 것입니다.
‘우상의 더러운 것’에서 우상의 정체성은 바로 ‘나’입니다. 우상이라는 것은 ‘허구’입니다. 나의 외부에 우상을 지정해 놓고 그것을 통해 내가 목표하는 것을 투영하는 것뿐입니다. 그런데 복음은 나를 부인하고 오직 예수님만 소망하는 것이죠. 그래서 이렇게 우상을 바라는 것은 복음을 막고 있는 것입니다. 그래서 우상은 피해야 할 것이 되죠.
‘음행’은 내가 사랑해야 할 사람은 버려두고 다른 사람을 사랑하는 것을 말하죠. 복음은 예수님께서 나를 사랑하고 내가 예수님을 사랑하는 1:1관계를 말합니다. 그런데 내가 예수님을 버려두고 다른 것을 사랑하거나 예수님이 나를 버려두고 다른 사람을 사랑하면 구원이 성립이 되지 않죠. 그래서 음행은 피해야 할 것이 되죠.
‘목매어 죽인 것’이 상징하는 것은, 우리 신체에서 머리는 예수님을 상징합니다. 예수님은 우리의 머리이시며 우리는 예수님의 지체죠. 그래서 한몸이 되는 것입니다. 그런데 머리가 분리되면 온몸은 죽죠. 그래서 목매어 죽은 것은 피해야 할 것이 되죠.
‘피’는 생명입니다. 인간이 피(생명)를 스스로 취하려 하는 것은 복음을 거부하고 스스로 구원을 얻으려는 행위입니다. 그래서 절대 피 채 먹지 말라는 말씀이 나온 것입니다. 오직 우리가 생명을 얻는 방법은 예수님 뿐입니다. 그래서 스스로 구원을 얻으려는, 피를 먹는 행위는 피하고 예수님과 연합이 되어야 하는 것입니다.
야고보의 이 4가지 지침이 복음을 설명하는데 유익하다는 것이 이제 이해가 되셨죠? 그런데 이 4가지의 ‘형식 섬기기’에 빠질 수 있기 때문에 이 4가지 지침을 기록하기 전에 야고보의 ‘내 의견에는~~~~’이라는 기록을 남기신 하나님의 섬세함이 보이시나요?
끝