사도행전(완료)

행14:11-18(22.08.24.수)

은혜바라기 2022. 8. 24. 08:22

 무리가 바울이 한 일을 보고 루가오니아 방언으로 소리 질러 이르되 신들이 사람의 형상으로 우리 가운데 내려오셨다 하여
바나바는 제우스라 하고 바울은 그 중에 말하는 자이므로 헤르메스라 하더라
시외 제우스 신당의 제사장이 소와 화환들을 가지고 대문 앞에 와서 무리와 함께 제사하고자 하니
두 사도 바나바와 바울이 듣고 옷을 찢고 무리 가운데 뛰어 들어가서 소리 질러
이르되 여러분이여 어찌하여 이러한 일을 하느냐 우리도 여러분과 같은 성정을 가진 사람이라 여러분에게 복음을 전하는 것은 이런 헛된 일을 버리고 천지와 바다와 그 가운데 만물을 지으시고 살아 계신 하나님께로 돌아오게 함이라
하나님이 지나간 세대에는 모든 민족으로 자기들의 길들을 가게 방임하셨으나
그러나 자기를 증언하지 아니하신 것이 아니니 곧 여러분에게 하늘로부터 비를 내리시며 결실기를 주시는 선한 일을 하사 음식과 기쁨으로 여러분의 마음에 만족하게 하셨느니라 하고
이렇게 말하여 겨우 무리를 말려 자기들에게 제사를 못하게 하니라


 어제 묵상에서 우리는 못 걷는 자를 고쳐주는 바울의 에피소드를 통해 복음의 전 과정을 설명해주는 성령님의 음성을 들었습니다. 그런데 인본주의에 묶여 있는 자들은 이것을 오직 ‘신비주의적 인본주의’로만 바라보게 됩니다. 

 신비주의는 인본주의의 한 갈래라고 전에 말씀드렸죠? 인본주의로 해석할 수 없는 것들을 ‘신비주의’라는 카테고리로 묶어서 해석을 하는 것이므로 그 출처가 인본주의의 출발입니다. 

 오늘 11절, 무리들은 이런 바울의 표적과 기사를 보고 ‘신들이 사람의 형상으로 우리 가운데 내려 오셨다.’고 풀어 냅니다. 이것을 보고 ‘이런 어리석은 사람들~~~’하고 생각하시죠? 그러나 이 무리들이 바로 ‘나’입니다. 교회에서 어떤 능력을 가진 자들이 나타나면 많은 교인들은 그 자를 ‘와~~우~~~’하면서 바라보는 것이 지금의 교회 현실입니다. 오늘 묵상의 초점은 바로 이 부분입니다. 다른 사람 이야기하는 것이 아닙니다. 바로 인간의 영향력에 흔들리는 ‘나’의 이야기입니다. 

 12-13절에 보면, 이들은 바울과 바나바를 제우스와 헤르메스라는 신으로 보고 그들에게 제사를 드리려고 몰려들죠. 지금 교회에서도 ‘신비주의’에 혹해서 그것을 바라고 그 능력을 위해 기도하는 모든 행위들을 성령께서 꼬집고 있는 것입니다. 

 현대 교회에서 하나님의 기적적 치료의 은사, 즉 신유의 은사가 실제로 존재할까요? 정답은 없습니다. 정확하게는 필요가 없습니다. 복음적으로 보면 이런 기적은 의미가 없기 때문입니다. 성경이 완성되지 않은 시점에서는 하나님께서 복음을 설명하기 위해서 그 무엇인든지 필요하면 사용하셨습니다. 그러나 복음이 완벽하게 설명된 성경이 완성된 지금은 모든 복음은 오직 성경으로만 표현이 됩니다. 그 이유는 성경은 복음을 설명하기에 가장 완벽한 방법이기 때문이죠. 즉, 성경은 복음을 설명하기에 1도 부족하지 않습니다. 그런데 그런 성경의 부족함을 보완하기 위해서 하나님께서 기적을 동원하신다? 이것은 성경이 부족하다는 모순을 낳게 되는 것이죠. 

 하지만 실제로 교회에서 암이 치료되는 기적적인 사건이 가끔이 발생하죠. 그런데 이런 사건은 교회 뿐 아니라 불교, 이슬람, 힌두교에서도 똑 같습니다. 민속 신앙에서도 발생하죠. 미국의 유명한 연예인이 만화책을 몇 백권을 읽었더니 암이 낫다는 이야기도 존재하죠.  심지어 세상 병원에서 이런 기적의 확률은 더 많이 발생합니다. 이렇게 기적적 치료라고 불리는 현상들은 모든 사람의 몸 안에 공평하게 존재하는 자가치료라는 하나님의 일반 은총일 뿐입니다. 즉, 살인하고 감옥에 있는 사람들도 모든 사람과 같이 똑같이 태양과 공기의 은총을 누리는 것과 같습니다. 

 오늘 말씀에서도 바울과 바나바를 ‘신비주의’로 해석하는 자들을 향해 14절에서 두 사도는 ‘옷을 찢고’ 그들에게 소리를 지르죠. 중동 지역의 사람들에게 겉옷은 생명을 보호하는 수단이었습니다. 그래서 겉옷을 찢는 행위는 바로 ‘나~죽어버리고 싶다.~~’의 감정의 표현입니다. 그 정도로 극도의 분노 혹은 극도의 좌절등을 표현하는 것이죠. 

 이 구절은 우리가 교회에서 기적을 바라고 그것에 매달리는 것을 바라보는 예수님의 심정을 고스란히 보여주는 구절입니다. 이것에 대하여 바울의 짧은 설교가 시작되죠. 

 15절. ‘ 여러분이여 어찌하여 이러한 일을 하느냐 우리도 여러분과 같은 성정을 가진 사람이라 여러분에게 복음을 전하는 것은 이런 헛된 일을 버리고 천지와 바다와 그 가운데 만물을 지으시고 살아 계신 하나님께로 돌아오게 함이라 ’

 정확하게 ‘신비주의적 해석을 헛된 일’이라고 선언하죠. 그리고 오직 ‘하나님께 돌아오게 함’이 목적이라고 합니다. 하나님과의 관계 회복을 말합니다. 그 필수 조건이 바로 예수 그리스도입니다. 

 16절에서 보면, 하나님이 지나간 세대는 방임하셨다고 나오죠. 이 말씀은 과거에 이 지역 사람들에게 선지자나 말씀을 통하여 특별히 계시하지 않으셨다는 것을 이야기합니다. 이 말씀은 이 지역 사람과 바울과의 이야기이지만 이것이 성경에 기록된 순간 이 이야기는 성령님께서 나에게 해주시는 말씀으로 바뀌게 됩니다. 

 즉, 누구나 교회에 처음 출석하여 성경을 보고 예수님을 처음으로 듣게 된 '시간'이 존재하겠죠. 그 시간 전의 과거에 대하여 하나님께서는 '나를 방임하셨다'는 말입니다. 그러나 이 방임은 유기와는 다른 말입니다. 방임은 친 아들이 자기 마음대로 살겠다고 생떼를 쓰자 그럼 '네 마음대로 해봐~~'라고 놔두는 것을 말하지만 유기는 나와 상관없는 남의 아들이기 때문에 전혀 상관하지 않는다는 것입니다. 

 

 그래서 17절에서 보면, 그 순간에도 하나님은 자기를 증언하지 아니하신 것이 아니라고 합니다. 곧 비를 내리고 곡식을 결실하는 것과 음식과 기쁨을 통해 마음이 만족하게 하셨는데 이것이 곧 그 분이 자기를 증언하는 것이라는 것입니다. 이 부분은 매우 중요한 대목입니다. 

 

 하나님께서 '방임'이라고 표현을 하셨지만 사실 이 모든 순간에도 하나님께서는 우리를 그 분의 울타리 안에 품고 있다는 것이죠.  즉, 모든 자연현상과 모든 규칙과 질서들 속에 하나님의 증거가 모두 들어 있다는 것입니다. 그렇다면 왜 하나님께서는 '방임'을 하시는 것일까요? 그 의미는 어렵지 않죠? 바로 하나님과 분리된 나의 삶이 얼마나 비참하지 알게되는 은혜를 알게 된다는 것입니다. 이것을 매우 잘 설명한 에피소드가 바로 '돌아온 탕자의 비유'입니다. 

 

 이런 방임의 시간은 우리가 복음을 알게 된 이후에도 계속 벌어집니다. 잠시라도 우리가 깨어있지 못하면 우리는 늘 방임의 상태로 놓이게 됩니다. 그 순간 우리는 늘 우리의 기준에 맞추어 '잘살기'에 매몰됩니다. 그러다가 성령님의 음성을 듣고 다시 눈을 떠서 복음을 바라보게 되죠. 

 

 천지창조의 모든 이유과 목적은 바로 ‘복음을 설명하는 것입니다. 즉, 우리가 태어난 목적도, 우리가 인생을 사는 목적도 오직 ‘복음을 알게 되는 것’이 전부라는 것을 알아야 합니다.

 

 끝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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