사도행전(완료)

행15:22-35(22.08.31.수)

은혜바라기 2022. 8. 31. 08:28

이에 사도와 장로와 온 교회가 그 중에서 사람들을 택하여 바울과 바나바와 함께 안디옥으로 보내기를 결정하니 곧 형제 중에 인도자인 바사바라 하는 유다와 실라더라
그 편에 편지를 부쳐 이르되 사도와 장로 된 형제들은 안디옥과 수리아와 길리기아에 있는 이방인 형제들에게 문안하노라
들은즉 우리 가운데서 어떤 사람들이 우리의 지시도 없이 나가서 말로 너희를 괴롭게 하고 마음을 혼란하게 한다 하기로
사람을 택하여 우리 주 예수 그리스도의 이름을 위하여 생명을 아끼지 아니하는 자인 우리가 사랑하는 바나바와 바울과 함께 너희에게 보내기를 만장일치로 결정하였노라
그리하여 유다와 실라를 보내니 그들도 이 일을 말로 전하리라
성령과 우리는 이 요긴한 것들 외에는 아무 짐도 너희에게 지우지 아니하는 것이 옳은 줄 알았노니
우상의 제물과 피와 목매어 죽인 것과 음행을 멀리할지니라 이에 스스로 삼가면 잘되리라 평안함을 원하노라 하였더라
그들이 작별하고 안디옥에 내려가 무리를 모은 후에 편지를 전하니
읽고 그 위로한 말을 기뻐하더라
유다와 실라도 선지자라 여러 말로 형제를 권면하여 굳게 하고
얼마 있다가 평안히 가라는 전송을 형제들에게 받고 자기를 보내던 사람들에게로 돌아가되
(없음)
바울과 바나바는 안디옥에서 유하며 수다한 다른 사람들과 함께 주의 말씀을 가르치며 전파하니라


 오늘의 말씀은 쉽습니다. 그리고 3일에 걸쳐 묵상한 것을 다시 반복하는 내용입니다. 

 오늘의 말씀을 정리하면, 유다와 실라가 바울과 바나바와 함께 안디옥으로 파송되죠. 그곳에서 그동안 논쟁했던 ‘할례’를 ‘짐 지우기’라고 선언하면서 일단락합니다. 그리고 야고보의 4가지 지침을 전하고 돌아가죠. 그리고 그곳 안디옥에 남은 바울과 바나바는 주의 말씀을 계속 전한다는 내용입니다. 

 이렇게 같은 사실로 에피소드를 두 번씩이나 반복하는 것은 하나님께서도 매우 중요하게 생각하시고 있다는 것입니다. 그래서 우리도 같은 묵상을 반복해 보죠. (사실 모든 묵상은 전부 다 같은 진리인 복음을 반복하는 것 뿐입니다.)

 오늘의 말씀의 핵심은 신앙생활(여기서 할례로 표현된)은 모두 무가치하다는 것이고 진짜 가치는 오직 복음을 알게 되는 것, 즉 예수님을 알게 되는 것이라는 것입니다. 즉 방향성의 문제라는 것입니다. 우리의 시각을 신앙생활에 두지 말고 복음에 두라는 것이죠. 이것이 너무 너무 중요해서 하나님도 계속 반복, 반복하고 계시는 것입니다. 또한 계속 2명, 2명씩 나오는 이유도 2가 증거의 숫자이므로 이 말씀이 완벽하게 복음을 증거하고 있다는 것을 강조합니다. 

 24절을 보면 ‘어떤 사람들이 우리의 지시도 없이 나가서 말로 너희를 괴롭게 하여 마음을 혼란하게 한다.’고 나옵니다. 여기서 ‘우리’는 교회를 말하고 성경에서 교회는 예수님과 한몸을 말합니다. 즉, 어떤 사람들이 예수님의 지시도 없이 너희를 말로 괴롭게 한다는 뜻입니다.  

 이것을 현대의 교회로 옮겨 생각을 해보면, 예수님의 지시도 없이 지금 교회는 신앙생활이라는 것으로 우리를 괴롭게 하고 있다는 말입니다. 그렇다면 교회도 다니지 말고 교회의 모든 예배와 프로그램을 끊어야 하는가? 그렇게 되면 그것은 영지주의 이단이 되는 것입니다. 하나님께서 이 세상에 교회라는 제도를 허락하셨고 그 제도는 복음을 알아들을 수 있는 도구이자 통로가 되죠. 어렵죠?

 그런데 이것은 현대 교회뿐만이 아닙니다. 구약에서 하나님이 율법을 주신 이유도 마찬가지입니다. 하나님께서 사람에게 율법을 주신 이유는 우리가 그것을 완벽하게 지켜내라고 주신 것이 아닙니다. 율법은 일종의 ‘측량도구’입니다. 즉, 율법으로 나를 측량해서 죄인인가? 의인인가?를 알려주는 것입니다. 모든 인간은 이 측량에서 모두 부적합 판정을 받게 되죠. 오직 예수님만이 적합 판정을 받게 됩니다. 그래서 오직 예수님만이 천국에 합당한 분입니다. 

 그런데 그런 예수님께서 십자가에서 죽으시면서 반전이 일어나죠. 의인이 십자가에서 죄인의 벌을 감당하셨기 때문에 ‘모순이 생긴 재판’이 된 것입니다. 그래서 하나님께서는 예수님께 보상을 해야 하는 것입니다. 예수님은 그 보상으로 그분의 신부들의 면죄를 요구하신 것입니다. 그래서 예수님이 지정한 선택받은 자들은 의인으로 칭함을 받게 된 것이죠. 죄인의 입장에서 보면 이것을 복음, 즉 복된 소식이라고 합니다. 그래서 우리의 소망은 오직 예수님께 있는 것입니다. 

 그런데 율법을 스스로 ‘잘 지켜내고 있다.’ ‘난 열심히 하고 있다.’ 의 기준으로 사는 자들이 있습니다. 이 자들이 가장 왕성했던 시기에 예수님이 오셨죠. 이 자들의 대표가 바로 바리새인입니다. 그리고 이 자들의 이런 행위를 ‘외식’이라고 합니다. 지켜낼 수 없는 율법을 지켜내고 있다고 고집하여 의로운 척하는 것을 말합니다. 이런 포커스로 신앙생활도 하셔야 합니다. 신앙생활은 내가 그것을 잘 지켜서 하나님께 무엇을 드리는 것이 아닙니다. 신앙생활은 내가 아무것도 할 수 없고 아무것도 드릴 수 없는 무가치한 존재라는 것을 깨달아 오직 예수님만 소망하는 자리입니다. 그냥 내 더러운 발을 내밀고 예수님께 '닦아주세요'하는 자리입니다. 절대적 진리 하나를 분명히 아셔야 합니다. 하나님은 오직 예수님만 받습니다. 

 왜 하필 인류의 수많은 시대 중에서 예수님은 바리새인의 시대에 오셨을까요? 그리고 왜 이 바리새인과 대적하셨고 이 바리새인들에 의해 십자가에 못 박히셨을까요? 그것은 바로 지금 현대 우리가 살고 있는 교회 시대가 그 바리새인의 시대라는 뜻입니다. 그리고 내가 바리새인이라는 뜻입니다. 인간은 어쩔 수 없이 신앙생활을 할수록 바리새인화가 되어갑니다. 신앙생활을 통해 또 무엇인가를 얻고, 쌓고, 받으려 하죠. 말세는 결국 진리의 싸움터입니다. 사탄은 어떡해서라도 그 진리에서 우리를 넘어뜨리려 하죠. 내가 신앙생활을 그럴듯하게 하고 있다고 생각하고 있을수록 난 진리에서 멀어지고 있다고 생각하시면 됩니다. 

 우리의 신앙생활은 전부 무가치합니다. 물론 신앙생활을 복음을 볼 수 있는 도구로 삼아야겠죠. 그러나 본질은 오직 예수님 뿐입니다. 하지만 대부분의 교인들은 오직 교회의 신앙생활 그 자체에 몰두합니다. 그리고 그것을 열심히 잘 해내는 것으로 ‘자기 의’를 쌓죠. 복음은 이 방향과 반대입니다. 신앙생활을 열심히 하는 것까지는 같지만 그렇게 해도 '자기 의'를 절대 쌓지 못한다는 것을 깨달아서 오직 예수님만 소망하게 되는 길에 서야 하는 것입니다. 그런데 이것을 알려면 신앙생활을 열심히 해 봐야 하죠. 그래서 신앙생활은 '도구'일 뿐입니다.

 예수님의 신부들은 모두 이런 시각을 가지고 있습니다. 교회에 가서 예배를 드리면서 ‘나는 절대 예배를 드릴 수 있는 존재될 수 없다는 것을 알게 되죠.’ 그래서 그들은 예배 시간에 예배를 하나님께 드리는 것이 아니라 오직 예수님만이 하나님께 예배를 드릴 수 있는 나의 신랑이라는 것을 고백합니다.

 그래서 예배는 드리는 것이 아닙니다. '예배를 본다.'라는 말이 더 복음적으로 합당합니다. 즉, 예수님만이 하나님께 예배를 드릴 수 있는 것이고 우리는 그것을 지켜보는 것이 맞습니다. 물론 예수님의 품 안에서 그분의 시야를 통해 그것을 지켜보는 것이죠. 그래서 우리는 예수님께서 하나님께 자신을 드릴 때 공짜로 그것에 참여되는 자들일뿐입니다.  

 찬양도 마찬가지입니다. 입술로는 찬양을 하지만 마음으로는 찬양은 오직 예수님만 부를 수 있겠다는 고백을 하게 되죠. 물론 찬양 중에 죄인의 고백이 담긴 찬양들은 이것은 ‘나의 이야기로구나~~’로 생각하게 됩니다. 또 어떤 찬양은 예수님을 가리키지도 않고 죄인의 고백도 담겨 있지 않은 찬양들도 많습니다. 오직 인본주의 종교의 특성인 ‘바람’ 만이 가득한 노래들도 많죠. 그런 찬양은 입으로 찬양은 하게 되지만 마음으로는 인간의 죄된 특성이 이런 찬양을 만들어내고 있다는 생각을 하게 됩니다. 예를 들어 볼까요? 

 이런 대표적인 찬양으로는 ‘할 수 있다 하신 이는 나의 능력 주 하나님~~~의심 말라하시고~~ 능력 준다 하시~~이~~네~~~ 할 수 있다 하신 주~~~~ 할 수 있다 하신 주~~~ 믿음만이 ~~~ 믿음만이 ~~~ 능력이라 하~아~시~이~네~~’ 라는 찬양입니다. 대부분 이런 찬양을 하면서 하나님께 능력 받아 이 세상에서 능력자로 변신하는 것을 꿈꾸죠. 완전히 복음과 반대의 방향성을 갖고 있는 찬양입니다. 그래서 찬양도 생각 없이(즉, 기도 없이) 부르시면 안 됩니다. 찬양은 곡조 붙은 기도입니다. 그리고 기도는 그 끝에 '예수님의 이름으로 기도합니다.'로 검증하죠. 즉, '예수님이라면 이렇게 찬양할 것이다.'라는 것을 묵상하며 찬양(기도) 해야 하는 것입니다.

 하나님께서 우리에게 바라시는 것은 ‘우리는 할 수 없다.’는 것을 깨닫는 것입니다. 그래서 오직 예수님만 소망하는 것이죠. 예수님의 능력으로 우리가 잘살게 되는 것을 소망하는 것이 아닙니다. 예수님과의 관계를 소망하는 것입니다. 예수님께서 잃어버린 한 마리 양을 찾듯이 나를 찾아 주시기를 소망하는 것입니다. 나를 기억해 주시기를 소망하는 것입니다. 

 다시 말씀으로 돌아가 보면, 유다와 실라는 29절에서 ‘우상의 재물과 피와 목매어 죽이 것과 음행을 멀리하라’는 야고보의 4가지 지침을 이방인들에게 전해주면서 평안함을 원한다고 말하고 돌아가죠. 전일 묵상에 나온 것의 반복입니다.

 

 다시 말하지만 이 4가지 치침은 야고보의 한계입니다. 이 4가지 지침도 사실 필요 없는 것입니다. 야고보는 '이 정도는 지켜야 하지 않을까?' 해서 말한 개인적인 사견입니다. 그런데 하나님께서 그것을 성경에 기록하셨죠. 그렇다는 것은 야고보의 의도와 상관없이 그 4가지 지침이 복음을 설명할 수 있다고 하나님께서 판단하신 것입니다. 

 한번 더 반복하죠. 우상은 예수님이 아닌 ‘나(혹은 나의 바람)’를 섬기는 것입니다. 피는 예수님이라는 생명을 버리고 나 스스로 ‘생명(피)’을 찾는 것입니다. 목매어 죽는 것은 교회의 머리 되신 예수님을 분리시켜 죽이는 것이죠. 음행이란 남편 되신 예수님을 버리는 것입니다. 모두 복음의 속성을 잘 설명하죠. 그러나 이 4가지 지침도 그 안에서 복음을 설명하는 본질을 보지 못하고 그 형식에 묶여서 ‘그 행위를 지켜냄’을 쌓는 자들이 되면 그것을 바리새인이라고 하는 것입니다. (즉, 피를 멀리하라고 했으니 난 절대 피순대는 안 먹어~~~ 라는 식이 됩니다.)

 이후 바울과 바나바는 안디옥에서 계속 복음을 전하는 장면으로 에피소드를 마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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