사도행전(완료)

행16:1-5(22.09.02.금)

은혜바라기 2022. 9. 2. 08:35

바울이 더베와 루스드라에도 이르매 거기 디모데라 하는 제자가 있으니 그 어머니는 믿는 유대 여자요 아버지는 헬라인이라
디모데는 루스드라와 이고니온에 있는 형제들에게 칭찬 받는 자니
바울이 그를 데리고 떠나고자 할새 그 지역에 있는 유대인으로 말미암아 그를 데려다가 할례를 행하니 이는 그 사람들이 그의 아버지는 헬라인인 줄 다 앎이러라
여러 성으로 다녀 갈 때에 예루살렘에 있는 사도와 장로들이 작정한 규례를 그들에게 주어 지키게 하니
이에 여러 교회가 믿음이 더 굳건해지고 수가 날마다 늘어가니라


 오늘은 디모데에 대한 이야기입니다. 1절 말씀은 디모데의 어머니는 ‘믿는 유대인’ 아버지는 ‘헬라인(이방인)’이라고 시작을 합니다. 여기서도 성령께서는 우리에게 어떤 것을 의도적으로 설명하고 계시죠. 즉, 유대인과 이방인이 함께 사는 것을 드러낸 것은 선택된 자들이 이 땅을 살면서 인본주의와 섞여 살아야 하는 것을 의도적으로 드러내시는 것입니다. 

 3절에서 바울은 디모데에게 할례를 행합니다. 그 이유가 바로 ‘그 지역에 있는 유대인으로 말미암아’입니다. 즉, 인본주의 종교의 규례를 따랐다는 것입니다. 조금 더 자세하게 말하는 ‘인본주의 종교인들이 디모데의 아버지가 헬라인(이방인)임을 알기 때문’ 이라고 나와 있죠. 즉, ‘디모데는 믿음 없는 이방인의 피가 흐르니 믿음 있는 척하는 이방인이 아닐까?’하는 그들의 의심을 해소하였던 것이죠. 

 오늘도 성령께서는 우리에게 꽤 어려운 숙제를 내어 주셨습니다. 이 묵상은 바로 직전에 묵상했던 15장과 밀접한 상관이 있습니다. 15장이 ‘할례’에 대한 묵상이었죠. 할례는 대표적인 교회의 규례입니다. 우리는 상상조차 할 수 없을 정도로 강력한 교회의 핵심 규례입니다. 즉, 교인인가? 아닌가?를 구분할 정도의 규례였죠. 그런데 성령께서는 이 ‘할례’를 ‘무거운 짐’ 혹은 ‘멍에’라고 베드로의 입을 통해 선언하셨습니다. 즉, 신앙생활은 전부 다 ‘가치없음’을 선언하신 것입니다. 

 다시 한번 반복합니다. 신앙생활은 절대 하면 안된다는 것이 아닙니다. 이 부분을 이해하지 못하면 절대 복음의 진영으로 단 한 발도 나아갈 수가 없습니다. 가장 중요한 신앙생활  혹은 신앙행위조차 가치 없다는 말은 그것을 절대 하지 말라는 말이 아닙니다. 만약 여러분이 이렇게 반대로 생각한다면 그것은 오히려 가치가 있는 것입니다. 즉 나쁜 가치가 있다고 느꼈기 때문입니다. 제가 이 부분을 매우 많이 반복해서 설명하듯이 성령께서도 성경의 많은 지면을 할애하여 반복적으로 이 부분을 설명하고 계시죠.   

 그런데 너무나 재미있게도, 오늘 16장에서 보면 바울은 그들의 눈치를 보면서 디모데에게 할례를 시켰죠. 또한 4절에서 보면, 야고보가 지시한 새로운 4가지 규례도 지키게 합니다. 그렇다면 바울이 뭔가 착각하고 잘못된 방향으로 나아가고 있는 것일까요? 그것은 아닙니다. 성령께서는 5절에 ‘이에 교회가 믿음이 더 굳건해지고 수가 날마다 늘어가니라’라고 일부러 기재하신 이유가 바울의 행동이 잘못된 방향이 아니라는 것을 가르치려는 의도이기 때문입니다. 

 이제 우리는 더 복잡해졌습니다. 성령께서는 15장에서 ‘할례’는 ‘멍에’일 뿐이라고 선언하셨는데, 16장에서는 할례에 강한 동조를 하시고 있으시죠. 모순입니다. 과연~~~  과연~~~  성령께서는 무엇을 말하고 싶으신 것일까요? 

 이제부터 하는 설명은 복음의 눈을 뜨지 못한 자들은 절대 이해할 수가 없는 내용입니다. 인본주의 선과 악으로 세상을 바라보는 자들은 검은색은 오직 검을 뿐이기 때문입니다. 그러나 복음의 눈을 뜬 자들은 이 세상을 바라볼 때 검은색이 복음에 사용된 경우 그 검은색은 흰색입니다. 이것은 설명으로 이해시킬 수 있는 부분이 아닙니다. 그러니 기도하는 마음으로 묵상하면서 잘 따라오시기 바랍니다. 

 할례 보다는 십일조로 설명을 해 보겠습니다. 아무래도 지금 교회가 실행하고 있는 제도로 설명을 하는 것이 좋겠죠. 조금 어렵습니다. 

 십일조도 할례와 똑같이 ‘멍에’ 일뿐입니다 즉, 아무런 가치가 없는 행위일 뿐입니다. 하나님께서는 단언컨대 당신의 십일조를 절대 받지 않습니다. 이런 사상은 완벽하게 인본주의 종교에 해당하는 사상일 뿐입니다. 인간이 만든 모든 종교는 인간의 재물을 신께 바치면 그 신이 좋아할 것이라고 믿죠. 기독교도 그 사상을 받아들인 것이죠. 

 그런데 이것은 매우 간단한 묵상만으로도 모순이 됩니다. 하나님은 이 세상을 창조한 분이십니다. 그런데 그분이 그 돈이 필요합니까? 하지만 그들은 ‘아닌데~~~ 난 그 돈 안에 들어 있는 나의 지극정성을 드린 것인데~~’ 라고 이야기하겠죠. 이것도 기독교에서는 완벽하게 모순이 됩니다. 인간은 모두 죄인이기 때문입니다. 예수님께는 인간의 마음에서 나오는 모든 것이 ‘악하고 더럽다’고 선언하셨죠. 이런 종류의 말씀은 성경에 무수히 많이 나옵니다. 

 “마태복음 15:18 입에서 나오는 것들은 마음에서 나오나니 이것이야말로 사람을 더럽게 하느니라”

 심지어 9개는 내가 쓰고 1개만 하나님께 드리면서, ‘난 내 정성을 다 드린 것이야~~’ 혹은 ‘난 교회에서 가장 십일조를 정확하게 내고 있는 훌륭한 교인이야~~’ 라고 스스로 칭찬하죠. 이것을 꼬집은 에피소드가 바로 ‘아나니아와 삽비라’의 에피소드입니다. 그 부부 둘은 결국 모두 죽죠(심판). 즉, 조금 억지스럽게 이 에피소드의 주제를 설명한다면, ‘당신이 십일조를 잘 내면 심판받습니다.’입니다. 제가 억지스러운 것이 아니라 진리를 이해시키기 위해 아나니아와 삽비라라는 억지스러운 에피소드를 성령께서 사용하실 만큼 우리의 어리석음이 크기 때문입니다. (그래도 인본주의 종교는 이 에피소드를 가지고 '교회에 거짓말하면 벌 받는다. 목사를 속이면 벌 받는다.'로 사용하죠.)

 그런데 왜 하나님께서는 구약에서 ‘십일조’라는 규례를 만드셔서 유대인들에게 지키라고 했을까요? 이 십일조는 정확하게 예수님을 가리키기 때문입니다. ‘10개 중 1개를 드려 나머지도 모두 드린바 되는 것’이 십일조의 개념이죠. 하나님은 이 개념이 정확하게 예수님의 정체성을 가리키는 도구로 사용할 수 있다고 생각하신 것입니다. 즉, 예수님이 대표로 십자가에서 죽으심으로 말미암아 나머지 모든 선택받은 자들이 구원을 얻게 되는 것을 가리키죠. 

 인간에게 이 개념(본질)을 가르치고 이것을 계속 후대에 전달시키기 위해서 하나님께서는 그 개념이 들어 있는 ‘십일조’라는 제도를 허락하신 것입니다. 그런데 십일조의 실체이신 예수님께서 직접 이 땅에 오셔서 그 모든 것을 이루셨죠. 그래서 그것에 대한 상징(십일조)이 필요 없게 된 것입니다. 그 이유는 이 모든 개념을 직접 설명하고 있는 ‘성경’이 완성되었기 때문입니다. (심지어 예수님께서 십자가를 지셨을 때 성소의 휘장이 둘로 갈라져 버렸죠. 모든 율법이 갈라져버린 것입니다. 그런데도 인간은 그 갈라진 천 쪼가리(신앙생활)에 집착합니다.)

 그래서 십일조라는 제도는 그냥 ‘멍에’일 뿐입니다. 그런데 이 십일조가 ‘멍에’이긴 한데 이 십일조 개념은 매우 훌륭하게 복음을 설명하고 있죠. (물론 대부분의 사람들은 자기의 지극정성을 드린다는 착각으로 드리고 있지만요~~~) 즉, 이런 ‘멍에’ 일지라도 복음의 눈을 가진 자들에게는 그 멍에가 복음을 해석하는 도구로 사용이 되어서 복음의 지경을 더 넓히는데 이용이 되겠죠. 

 즉, 십일조가 헛 짓이며, 멍에일 뿐이라는 무가치함을 설명하는 설명하는 글이 15장이었다면, 아무리 ‘똥 덩어리’라도 복음의 눈을 가진 자들은 그 안에서 복음을 발견하여 이용하다는 것을 설명하는 글이 바로 16장입니다. 

 실제로 복음의 눈을 가진 자들은 아침마다 ‘똥’을 누면서 왜 하나님은 사람에게서 이런 더러운 똥이 나오게 하였을까?를 묵상합니다. 이것은 매우 강력한 하나님의 묵상계획입니다. 하나님은 사람을 창조하면서 사실 ‘배설하기’이라는 제도를 안 만드셔도 되었죠. 하나님은 전지전능하시기 때문입니다. 그런데 더럽고, 귀찮고 반복적인 이 지겨운 행위를 만드셨죠. 그러나 인간이 꼭 반복해야만 하는 것은 하나님이 매우 강하게 무엇인가를 말씀하고 계시는 것입니다. 과연 무엇일까요? 바로 아까 예수님께서 말씀하신 ‘인간의 안에서 나오는 모든 것이 더럽다.’는 것을 강조하고 계시는 것입니다. (실제로는 똥이 아니라 우리의 마음을 이야기하고 있다는 것 정도는 눈치채셨죠?)

 그래서 바울은 ‘멍에’뿐인 할례를 의미를 두고 실행한 것이 아닙니다. 반대로 의미가 없고 가치가 없는 것이기 때문에 실행할 수 있는 것입니다. 즉, ‘해도 그만, 안 해도 그만’의 지경의 수준까지 그 가치없음을 알아버린 것이죠. 십일조도 마찬가지입니다. ‘해도 그만, 안 해도 그만’입니다. 한 달에 백만 원도 못 버는 가정에서 십일조를 떼어서 한 달에 5백만원 넘는 목사의 월급을 채워주는 교회가 정상이라고 생각하십니까? 그렇게 가르치는 목사도 문제이지만 그것을 통해 자기 의를 쌓고 있는 자들도 마찬가지로 맹인일 뿐입니다. 한달에 백만원 벌면 그냥 매주 2-3천 원 정도만 헌금하세요. 그것도 하나님께 말고 교회 회비 낸다는 생각으로 말입니다. 

 그러나 이렇게 생각할 수 있겠죠. 아무도 헌금을 안 하면 교회가 어떻게 유지를 하는가? 여러분의 생각에 우리가 헌금을 안 하면 하나님께서 교회를 정말 유지 못할 것 같습니까? 정말 이런 생각은 골수까지 인본주의 종교에 뿌리 박혀 있는 것입니다. 그럼 미래를 가정해 보죠. 만약 이런 경우가 온다면 교회 건물은 팔리고 복음을 알고 있는 믿음 있는 가정이 그 집을 제공하면서 가정교회로 변하겠죠. 그리고 월급을 못 받는 많은 목사들은 목회를 그만둘 것이고 정말 복음을 전달하는 것만으로도 즐거운 목사만 살아남겠죠. 실제로 이런 목사님들은 분명히 존재합니다. 그런데 오히려 지금같이 이력서가 넘쳐나는 현대교회에서 이런 목사님들이 설 자리가 없어지죠. 조금 억지스럽게 말한다면, 우리가 내는 많은 헌금이 대형 교회를 만들고 그 대형교회가 그 수준에 맞는 이력서를 가진 목사들만 초빙하게 되면서 우리는 진짜 복음의 진영에 있는 목사들을 쫓아내고 있는 것입니다. 물론 이것은 조금 억지스러운 예입니다. - 너무 진지하게 생각하지는 마세요. 하나님의 섭리는 이것보다 더 크고 넓고 복잡합니다. 이 억지스러운 예의 요점은 내가 내는 헌금이 있어야 하나님이 교회를 운영하다. 혹은 복음을 진행시킨다라는 생각조차 하지 말라는 것입니다. 

 그런데 정말로 복음의 진영에 있는 목사님들과 이런 가정 교회들이 넘쳐나면 진짜 신날 것 같지 않습니까? 하지만 그러려면 지금의 교회는 망해야 되겠죠. 이것도 이상하죠? 전부 다 이상한 것 투성이죠? 우리의 작은 머리로 하나님을 제단 하지 마세요~~  오직 본질만 생각하세요. 오직 복음만 생각하세요. 오직 복음의 주인공이신 예수님만 소망하세요. 그것이 답입니다. 

 

P.S
( 홈페이지 처음에 보면, 지난 묵상과 특별 묵상이 포스팅되어 있습니다. 시간 나실 때 마다 계속 보시면서 묵상하세요. )

 매주 금요일은 전도에 대한 반복 메시지를 올려 드립니다. 사명이라고 생각하지는 마시고 그냥 살아가시다가 "마음이 가난한 자"가 눈에 들어오면 이 묵상을 권해 주세요. "때를 얻든지 못 얻든지" 전파해 주세요.(그러나 이 뜻은 '아무 때나 무조건‘ 전하라는 말이 아닙니다. 이 말도 행위로 파악하여 책임감에 어깨가 짖 눌리신 분들이 많죠. 이 말은 "전도는 인본주의를 고려하지 말라"는 뜻입니다. )

 전도는 설득이 아닙니다. 복음은 설득과 이해로 알 수 있는 것이 아니기 때문입니다. 전도는 '잃어버린 양을 찾는 것'입니다. 잃어버린 양들의 모습은 매우 동일합니다. 길을 잃어 버려서 마음이 가난해져서 애통한 상태죠. 즉, 삶(인생과 신앙)의 가치를 잃고 애통한 상태에 놓여 있죠. 그런데 이 모습이 바로 '복된 모습'입니다. 복음(복)을 받을 수 있는 유일한 모습이기 때문입니다. 

 많은 교인들이 듣기 좋은 설교, 외롭지 않은 교회 활동, 나의 가치를 높이는 봉사와 기부활동을 통해 '신앙생활' 이라는 것을 하지만 잃어버린 양들은 '참 예수님'을 만나기 전까지 늘 마음 한구석에 '텅 빈 가난함'을 인식하죠. 교회 안에서, 성경을 읽으면서 늘 모순됨을 인식합니다. 그들은 어느 순간 막혀 있는 곳에서 길을 잃어 버립니다. 

 주위에 이런 분들이 눈에 들어 온다면 이 묵상을 권해 주세요. 반대로 마음이 부유한 자들을 설득하려 하지 마세요. 마음이 부유한 자들이란 사회에서, 교회에서 자신의 가치를 쌓아가는 자들입니다.(물론 그들 중에서는 마음 깊은 곳에서 가난함을 인식하는 자들도 있겠죠) 그들에게 그 가치를 부인하고 오직 예수님의 가치만을 알리는 것은 불가능합니다. 자신의 가치와 예수님의 가치가 충돌하죠. 그리고 다시 한번 예수님을 살인(부인)합니다. 그리고 그것을 전달하는 여러분을 박해(오해)하죠. 이것은 누구도 예외가 없습니다. 이것이 가장 살벌하게 일어날 수 밖에 없는 관계가 부모와 자식, 형제와 형제 즉, 가족입니다. 사랑하기에 때릴 수 밖에 없는 관계라고나 할까요!!

 오직 삶(인생과 신앙)의 가치를 잃어버린 여러분의 참 형제를 찾아 이 글을 권해주세요. 그들이 결국 영원한 천국에서 여러분의 참 형제요, 자매가 되실 분입니다. 그 날을 생각해 보세요^^

 주말과 공휴일은 묵상이 없습니다. 친구, 가족과 재미있게 잘 보내시고 다니는 교회에서 하나님의 음성을 잘 듣도록 기도하세요. 재미있게도 눈을 뜬 자들은 어떠한 이단목사의 설교를 통해서도 복음으로 가공해서 해석할 수가 있다는 것입니다. 이것을 예수님이 이렇게 말씀하셨죠. “그들의 행위는 본 받지 말고 그들이 하는 말은 잘 지켜라 ” 어떠한 기독교 이단이라도 성경말씀을 전파하는 통로로 하나님은 사용합니다. 이 말은 어떠한 정통교회 목사라도 이단적 발언은 항상 존재한다는 말이죠. (저의 묵상을 포함해서 모든 가리키는 손가락들은 진리가 아닙니다. 오직 말씀이 가리키는 목표인 예수님을 볼 수 있어야 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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