사도행전(완료)

행15:36-41(22.09.01.목)

은혜바라기 2022. 9. 1. 08:16

 며칠 후에 바울이 바나바더러 말하되 우리가 주의 말씀을 전한 각 성으로 다시 가서 형제들이 어떠한가 방문하자 하고
바나바는 마가라 하는 요한도 데리고 가고자 하나
바울은 밤빌리아에서 자기들을 떠나 함께 일하러 가지 아니한 자를 데리고 가는 것이 옳지 않다 하여
서로 심히 다투어 피차 갈라서니 바나바는 마가를 데리고 배 타고 구브로로 가고
바울은 실라를 택한 후에 형제들에게 주의 은혜에 부탁함을 받고 떠나
수리아와 길리기아로 다니며 교회들을 견고하게 하니라


 오늘은 바울과 바나바가 심히 다투는 사건으로 시작을 합니다. 그 이유는 사역하는 길에 마가를 데리고 갈 것인지? 아닌지? 에 대한 의견 충돌입니다. 우리는 이 두 사람이 싸운 것에 관심을 둘 필요가 없습니다. 우리가 관심을 둬야 하는 것은 하나님께서 이 장면을 왜 성경에 기록했는가?입니다. 

 그 이유가 뭘까요? 이 에피소드에서 하나님께서 말씀하시고자 하는 것은 바로 ‘선악’에 관한 개념입니다. 

 대부분 이 에피소드를 대하면,  바나바가 옳은가? 바울이 옳은가? 에 대한 논쟁을 하죠. 혹은 ‘둘 다 옳지 않다’라는 결론을 내기도 합니다. 이 사건이 발생한 계기는 38절에 나와있습니다. 전에 마가는 사역을 하다가 어떤 이유로 사역을 포기하고 떠난 적이 있었던 것이죠. 그 행위를 두고 바나바와 바울이 격돌합니다. 

 바나바는 마가를 용서하고 다시 동역하는 것이 옳다고 주장하는 것이고 바울은 마가의 그런 행위가 옳지 못하다고 생각하여 같이 동역할 수 없다고 주장하는 것이죠. 이 둘의 주장 중에 어떤 것이 옳은가?를 성경은 우리에게 질문으로 던져 놓았습니다. 

 자~~~ 그럼 여러분은 어떠신가요? 어떤 주장이 복음적으로 옳다고 생각하죠? (사실 여기에는 더 큰 질문이 들어 있습니다.)

 정답을 말씀드리겠습니다. 조금 어렵습니다. 잘 이해하세요. 이 에피소드의 진짜 질문은 바로 ‘이 두 사람의 주장 중에 어떤 것이 옳은가?’를 고민하는 ‘나’와 지금 사도행전을 이끌고 나가고 있는 하나님과의 선악 대결이 그 진짜 질문입니다. 어렵죠? 

 ‘하나님은 선한 일을 하신다.’라는 명제가 옳습니까? 틀립니까? 이 명제는 틀립니다. 하나님은 선한 일을 하시는 것이 아니라 하나님이 하시는 것이 선한 일이라고 하는 것입니다. 하나님께서는 이 차이에 대한 고민을 오늘의 에피소드에서 제시하고 있는 것입니다. 

 어렵기 때문에 조금 풀어서 해석을 해 볼께요. 하나님께서는 사도행전을 통해 복음의 속성을 설명하고 복음이 어떤 방식으로 전파되는지를 설명하고 있습니다. 하나님은 여러 가지 도구들을 사용하셔서 복음을 전파하고 계시죠. 그 도구들 중에서는 ‘인간의 분쟁’을 사용하시기도 합니다. 그래서 이 때 사용된 ‘인간의 분쟁’은 선한 도구입니다. 

 누구나 오늘의 에피소드를 읽으면 자연스럽게 바나바와 바울을 나의 선악의 기준으로 비판을 하게 됩니다. 누가 옳은가? 혹은 둘 다 옳지 않으가? 이런 식이죠. 그런데 이런 판단은 바로 ‘선악을 판단하는 기준’이 나에게 있다는 것을 의미합니다. 그런데 하나님께서는 이 이 기준을 그 분의 기준으로 옮기기를 바라는 것이죠. 

 그래서 오늘 바나바와 바울의 심한 다툼과 분리는 이 자체로 ‘선’입니다. 이것을 통해 서로 나누어지고 그로 인해 16장부터 바울의 본격적이 복음 사역이 시작됩니다. 그래서 오늘도 마지막 41절이 ‘교회를 견고하게 하니라’로 마치게 되는 것이죠. 

 마찬가지로 우리의 인생도 이런 메카니즘이 적용됩니다. 우리의 선악 개념은 전부 ‘인본주의’에 기준합니다. 그런데 인본주의 자체가 ‘악’이기 때문에 우리의 이러한 판단 개념은 전부 ‘악’입니다. 오직 하나님의 계획 안에 들어 있는 ‘복음의 길’ 만이 선하죠. 그 길을 예수님이라고 합니다. 

 그 어떤 것도 스스로 선하다 악하다. 옳다, 그르다고 판단하지 마십시오. 그 기준은 오직 하나님께만 있습니다. 그나마 그것을 인식하고 사는 것을 ‘선한 삶’이라고 합니다. 

 영화 밀양으로 오늘의 묵상에 대한 질문을 다시 한번 던지죠! 

 주인공 신애는 아들이 유괴되어 죽었죠. 그런데 그 고통의 시간을 통해 크리스천이 됩니다. (질문1. 이 때 아들이 유괴되서 죽은 것은 선일까요? 악일까요? 성급하게 판단하지 마세요. 왜냐하면 그로인해 신애가 크리스천이 되었다는 것을 상기해야합니다.  )

 이후 신애는 그 살인범을 용서하려고 면회하러 가죠. 그런데 그 살인범이 감옥에서 복음을 듣고 이미 크리스찬이 되어 있습니다. (그렇다면 이 살인범이 저지를 행위가 선인까요? 악일까요? 이 자는 그 죄로 인해서 감옥에 가서 그곳에서 복음을 알게 되었다는 사실을 상기해야 합니다. )

 이 살인범은 신애에게 이렇게 말합니다. “하나님이 감사하게도 저 같은 놈에게 손을 내밀어 주시고 제 죄를 용서해주셨습니다. 그리고 마음의 평화를 얻었습니다.” (이 자의 이 뻔뻔한 고백은 악일까요? 아니면 선일까요?)

 이후 신애의 그 유명한 대사가 등장하죠. “내가 그 인간을 용서하기도 전에 어떻게 하나님이 그 인간을 먼저 용서할 수가 있어요?” (이 대사가 실제적으로 감독이 말하고 싶은 결론입니다. 즉, 인본주의 세상의 결론입니다. 그렇다면 여러분은 어떻게 생각하시나요? )

 각각의 대사 하나 하나가 전부 선악에 대한 깊은 고찰을 요구하죠. 특히 마지막 신애의 대사는 압권입니다. 제 생각에 이 세상 모든 사람들은 신애의 마지막 대사에 동조할 것입니다. 그러나 복음의 음성을 듣는 사람들은 이 마지막 대사가 ‘악’한 인간의 기준을 얼마나 잘 드러내는지를 보여주는 좋은 장면이라고 생각할 것입니다. 즉, 복음으로 볼 때 이 마지막 장면의 신애는 가장 '악한 자'입니다. 그러나 인본주의에 묶여 있는 우리의 생각은 자꾸 그것을 거부하죠? 그래서 우리 스스로는 이 죄의 사슬에서 절대 벗어날 수가 없습니다. 그래서 우리는 오직 예수님만 소망하게 되는 것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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