성령이 아시아에서 말씀을 전하지 못하게 하시거늘 그들이 브루기아와 갈라디아 땅으로 다녀가
무시아 앞에 이르러 비두니아로 가고자 애쓰되 예수의 영이 허락하지 아니하시는지라
무시아를 지나 드로아로 내려갔는데
밤에 환상이 바울에게 보이니 마게도냐 사람 하나가 서서 그에게 청하여 이르되 마게도냐로 건너와서 우리를 도우라 하거늘
바울이 그 환상을 보았을 때 우리가 곧 마게도냐로 떠나기를 힘쓰니 이는 하나님이 저 사람들에게 복음을 전하라고 우리를 부르신 줄로 인정함이러라
우리가 드로아에서 배로 떠나 사모드라게로 직행하여 이튿날 네압볼리로 가고
거기서 빌립보에 이르니 이는 마게도냐 지방의 첫 성이요 또 로마의 식민지라 이 성에서 수일을 유하다가
안식일에 우리가 기도할 곳이 있을까 하여 문 밖 강가에 나가 거기 앉아서 모인 여자들에게 말하는데
두아디라 시에 있는 자색 옷감 장사로서 하나님을 섬기는 루디아라 하는 한 여자가 말을 듣고 있을 때 주께서 그 마음을 열어 바울의 말을 따르게 하신지라
그와 그 집이 다 세례를 받고 우리에게 청하여 이르되 만일 나를 주 믿는 자로 알거든 내 집에 들어와 유하라 하고 강권하여 머물게 하니라
오늘은 바울이 아시아로 전도를 하러가는데 성령께서 막으시는 장면으로 시작을 합니다. 성경에 나오는 아시아는 소아시아를 말하는데 지금의 터키 지역입니다. 이스라엘의 위쪽 지역이죠. 그리고 마게도니아는 터키의 좌측 유럽지역, 즉 그리스 쪽입니다. 그리고 더 좌측으로 가면 로마, 지금의 이탈리아 지역이죠. 즉, 바울은 이스라엘과 가까운 곳을 중심으로 전도를 하려고 했지만 성령께서는 바울을 계속 이스라엘과 멀리 떨어진 곳으로 보내시는 장면입니다. (결국 바울은 로마까지 가서 죽죠.)
9절에 보면, 성령께서 환상을 보여주는 장면이 있습니다. 이 장면을 가지고 지금도 많은 선교사들은 ‘자기의 환상’을 간증하곤 하죠. 전부 다 ‘뻥’이거나 ‘착각’입니다. 성경이 완성된 지금은 절대 그런 식의 계시는 존재하지 않습니다. 지금의 시대는 성령께서 오직 성경을 통해 복음을 가르치시고 그 가르침을 받은 자들은 복음의 지혜를 얻게 됩니다. 그런 지혜를 얻은 자들은 자신의 역량과 조건을 잘 구별하여 어떤 곳에서 복음을 전하는 것이 유익한지 판단할 수 있게 됩니다. 지금의 시대는 이러한 방식으로 성령께서 인도하는 시대입니다. 그 이유는 환상이나 기적보다 더 완벽하게 복음을 설명하고 계시하는 성경이 존재하기 때문입니다.
그러나 성경이 완성되지 않은 시대는 조금 다릅니다. 하나님께서는 성경을 기록하기 위해서 그 무엇이라도 사용하셨죠. 특히 성경 안에 복음의 속성을 좀 더 강하고 세밀하게 설명하시기 위해서 ‘기적과 환상’이라는 도구를 사용하신 것입니다.
그래서 오늘 말씀에서 보면, 바울에게 환상을 통해 ‘마게도냐로 가라’고 하신 것은 바울이 성령의 의도를 계속 눈치 채지 못하고 헛짓거리하고 있기 때문입니다. 그런데 이것을 보고, ‘아~~나도 저렇게 선교지에 대한 장소를 성령께 환상으로 받아서 가야겠구나~~~’로 해석을 하면 안 되는 것입니다. 그런 해석 자체도 틀린 것이지만 성경이 완성된 지금은 절대 그런 식의 환상은 없습니다. 계시를 받고 싶으시면 성경을 읽으시면 됩니다. 그래서 성경을 '특별 계시'라고 하는 것입니다.
이후 바울은 성령의 의도대로 마데도냐의 첫 지방인 빌립보에 도착을 합니다. 그곳에서 자색 옷감 장사를 하는 루디아라는 여자를 만나게 됩니다.
사도행전은 성령께서 복음을 어떻게 해석을 하고 그 복음을 어떻게 전달을 하는지에 대한 책이라고 말씀드렸습니다. 그래서 사도행전에서 사도들이 만나는 모든 사람들은 바로 ‘나’입니다.
그래서 루디아는 바로 ‘나’입니다. 성령께서 환상을 통해서라도 강권하여 바울을 마게도냐로 보내서 빌립보에서 루디아를 만나게 하였죠. 성령께서는 이 만남이라는 결과를 말씀하시기 위해서 무려 6절에서 15절까지 계속 바울을 달래가면서(환상을 보여가며) 끌고 오신 것입니다. 이렇게 표지판인 루디아가 가리키는 ‘내’가 복음을 알아듣게 되기까지 오직 성령께서 모든 것을 계획하시고 섭리하신다는 것이 오늘 묵상의 주제입니다. ( ‘환상보기’라는 허접한 장면에 사로잡히시면 안 됩니다. )
14절 후반에 보면, 루디아의 ‘그 마음을 열어 바울의 말을 따르게 하신지라’라고 나오죠. 복음은 절대 내가 이해해서 믿게 되는 것이 아닙니다. 복음은 성령께서 나의 마음을 열어서 내가 알아 듣게 되는 것입니다. 이후 루디아의 집에서 함께 머물죠. 이 장면은 천국에서 주님과 내가 함께 있는 것을 상징하는 것입니다. 이 짧은 6-15절을 통해 나의 구원은 출처는 결국 ‘하나님의 열심’이라는 것이 눈에 보이시나요?
이 루디아는 ‘자색 옷감 장사’로 표현이 되어있죠. 자색은 왕들이 입는 옷의 색깔을 가리킵니다. 예수님도 십자가에서 죽기 전에 로마군병이 이 자색 옷을 입혔죠. 이 로마 군병은 ‘유대인의 왕’이라는 예수님을 희롱할 생각으로 왕이 입는 색깔의 옷을 입힌 것입니다. 그런데 이런 희롱의 장면을 성령께서 그대로 성경에 기록을 하신 이유는 이런 희롱의 연출이라도 그 장면 안에서 복음을 설명하는 근거가 들어 있기 때문입니다. 즉, 예수님은 진짜로 모든 선택된 자들의 왕이라는 것을 의미합니다. 예수님이야말로 ‘참 왕’이시죠.
이 자색 옷감 장사 루디아는 결국 인본주의 세상에서 이 세상 왕들의 옷을 만드는 자로 시작을 한 자입니다. 그런데 이 루디아가 복음을 알게 되면서 진짜 왕이신 예수님의 옷(복음)을 만드는 자로 거듭난 것이죠.
끝