우리가 기도하는 곳에 가다가 점치는 귀신 들린 여종 하나를 만나니 점으로 그 주인들에게 큰 이익을 주는 자라
그가 바울과 우리를 따라와 소리 질러 이르되 이 사람들은 지극히 높은 하나님의 종으로서 구원의 길을 너희에게 전하는 자라 하며
이같이 여러 날을 하는지라 바울이 심히 괴로워하여 돌이켜 그 귀신에게 이르되 예수 그리스도의 이름으로 내가 네게 명하노니 그에게서 나오라 하니 귀신이 즉시 나오니라
여종의 주인들은 자기 수익의 소망이 끊어진 것을 보고 바울과 실라를 붙잡아 장터로 관리들에게 끌어 갔다가
상관들 앞에 데리고 가서 말하되 이 사람들이 유대인인데 우리 성을 심히 요란하게 하여
로마 사람인 우리가 받지도 못하고 행하지도 못할 풍속을 전한다 하거늘
무리가 일제히 일어나 고발하니 상관들이 옷을 찢어 벗기고 매로 치라 하여
많이 친 후에 옥에 가두고 간수에게 명하여 든든히 지키라 하니
오늘 묵상은 ‘귀신 들린 점치는 여종’에 대한 에피소드입니다. 이 여자의 정체성은 바로 ‘인본주의에서 이득을 가져다 주는 자'입니다. 그런데 복음을 듣게 되니 인본주의 이득에 관여하지 않게 된 자로 바뀌어 버렸죠.
성경에서는 ‘귀신 들린 것’에 대한 에피소드가 종종 나오곤 하죠. 그 이유는 ‘귀신 들린 것’은 인본주의에 묶여 오직 그 꼭대기만 바라보고 사는 삶을 완벽하게 표현하기 때문입니다.
한 가지 질문을 하죠. 과연 귀신은 있을까요? 혹은 귀신의 정체는 무엇일까요? 많이 어렵습니다. 잘 이해하셔야 합니다.
우리가 생각하는 귀신의 정체는 ‘인간이 만들어낸 허상’일 뿐입니다. 이 세상을 만드신 하나님께서 허락하지 않은 존재는 절대 이 땅에 존재할 수가 없습니다. 그러나 우리가 생각하지 못하는 진짜 귀신의 정체는 존재합니다. 그 진짜 귀신의 정체는 바로 ‘나’입니다. 오늘 조금 어렵습니다. 잘 따라오세요.
이 세상의 모든 것은 선하신 하나님께서 만드셨기 때문에 그 기초는 모두 ‘선함’입니다. 그런데 인간이 하나님께로부터 분리되었죠. 이것을 죄라고 합니다. 이것을 시청각 자료로 표현한 것이 선악과 에피소드죠. 그래서 인간은 귀신이 된 것입니다. 그래서 선악과 에피소드가 ‘사탄의 꾀임’으로 시작을 하게 되는 것이죠. 그래서 성경의 많은 곳에서 사람을 ‘마귀의 자녀’라는 표현으로 등장하는 것입니다.
“요일3:8상 죄를 짓는 자는 마귀에게 속하나니”
“요일3:10상 이러므로 하나님의 자녀들과 마귀의 자녀들이 드러나나니 ”
“요8:44상 너희는 너희 아비 마귀에게서 났으니 ”
이 세상, 즉 인본주의 자체가 바로 ‘마귀이며 귀신’입니다. 이 세상은 곧 인본주의로 불리죠. 그래서 우리는 모두 ‘귀신(마귀)’ 혹은 그 마귀의 자녀입니다.
그 당시 사람들은 유별난 정신병이나 이상한 자연 현상들을 해석할 수가 없기 때문에 이런 모든 것을 ‘귀신’이라는 카테고리로 분류해서 이해했던 것입니다. 그래서 하나님께서도 인간이 알아 듣기 쉽도록 인간이 분류해서 사용하는 귀신 카테고리를 복음을 설명하는데 사용하고 있는 것입니다.
이해가 되셔요? 어렵죠? 조금 더 쉽게 설명드릴께요. 5살짜리 어린 아이가 빵을 먹고 있는데 갑자기 ‘쥐’ 한 마리가 나와서 그 빵을 훔쳐 먹었다고 가정을 해보죠. 그래서 그 어린 아이가 아빠에게 가서 이렇게 말했다고 해보세요. ‘외계인이 와서 내 빵을 가져갔어요’ 이후 어린 아이가 유치원에 가게 되었습니다. 그런데 어린 아이가 유치원에 가서 공부하기를 싫어합니다. 이 때 아빠는 어린 아이에게 이렇게 말할 수 있겠죠. ‘얘야~~ 그렇게 유치원에 가서 공부하기를 싫어하면 외계인이 와서 너의 머리 속에 있는 지식을 가져갈 거야~~’ 이때 아이는 자신의 빵을 가져간 외계인(쥐)를 떠 올리며 아버지의 말을 쉽게 이해할 수 있겠죠? 이런 방식으로 성령께서는 ‘귀신’이라는 카테고리를 사용하여 우리에게 복음을 설명하고 있는 것입니다.
외계인은 허상입니다. 없죠. 마찬가지로 귀신도 없습니다. 그런데 ‘쥐’는 존재하죠. 마찬가지로 ‘사탄(귀신)’은 존재합니다. 그리고 참 사탄(귀신)이 바로 ‘나’입니다. 즉, 이 세상에서 정말 미친 사람처럼 행동하는 것은 그냥 ‘뇌에 병이 걸린 것’일 뿐입니다. 그러나 인본주의 시스템에서 보면 이것은 인본주의 기준에서 벗어나 있는 것으로 보이죠. 그래서 인본주의에 묶여 있는 자들은 이런 자들을 ‘귀신 들렸다.’라는 카테고리에 묶죠. 그러나 진짜 귀신 들린 자들은 오히려 인본주의에 묶여 있는 모든 인간입니다
마가복음5장에 보면, 군대귀신 에피소드가 나옵니다. 예수님께서 군대귀신 들린 자를 명하사 그 군대귀신을 돼지 떼에 넣고 몰살 시키는 장면이 나오죠. 그러나 이 장면도 예수님께서 유치원생의 수준에 있는 우리들에게 복음을 설명하시기 위해 ‘기적’이라는 도구를 꺼내서 사용하신 것일 뿐입니다. 즉, 우리가 '귀신'이라는 허구를 만들어 내서 그것을 진짜로 믿고 있으므로 그 허구를 사용해서 복음이라는 진짜 영적 세상의 실체를 설명하고 있는 것입니다.
이 군대 귀신 에피소드는 인본주의라는 큰 덩어리 자체가 ‘큰 귀신 덩어리(군대)' 라는 것을 설명하고 있는 것이고 예수님께서 복음으로 이 인본주의라는 커다란 군대귀신를 십자가로 심판하실 것을 설명하고 계시는 것입니다.(그렇다면 왜 하필 돼지떼로 들어가 죽을까? 복음을 알지 못하는 유기된 자들과 사탄이 함께 심판받을 것을 표현한 것이죠. --돼지는 오직 ‘먹는 것(잘살기)’에만 묶여 있는 상징입니다.)
이제 아셨죠? 이 세상에서 ‘잘살기’에 묶여 있는 내가 바로 ‘귀신들린 자’입니다. 조금 재미있게 표현하면, 서울대에 수석으로 입학해서 잘 살기만을 바라는 자, 최고의 회사에 취직해서 승승장구해가면서 잘 살기만을 바라는 자, 대통령이 되고, 정치가가 되어 나도 잘 살고 사람들도 잘 살기만을 바라는 자 이 모든 것이 바로 하나님의 방향에서 보면 ‘귀신들린 것’입니다. 마침 인간 스스로 인본주의에서 '귀신'이라는 카테고리를 사용하여 '나쁜 현상'을 이해하고 있으므로 이것을 이용하면 영적세상에서 바라보는 인본주의를 설명하기가 매우 좋을 것이라고 하나님은 판단하신 것입니다.
사탄은 실제로 존재하지만 그 사탄도 복음을 설명하기 위해 쓰여지는 하나님의 도구일 뿐입니다. 생각을 해 보세요. 만약 사탄이 하나님의 손을 떠나서 마음대로 할 수 있는 존재이고 이 세상 속에 수 많은 귀신들을 만들고 부릴 수가 있다면 이미 이 세상은 귀신들로 넘쳐나는 세상이 되었겠죠. 그리고 그런 막강하고 사악한 사탄의 입장에서 그렇게 하지 않을 이유도 없죠. 그리고 인간의 힘으로 그것을 막을 방법도 없구요.
다시 말씀드립니다. 사탄은 존재하지만 그 사탄은 복음의 도구일뿐입니다. 그리고 인간이 만든 귀신은 허구일 뿐이구요. 그런데 성경은 그 허구를 오히려 한시적으로 사실화시켜, 즉 한시적 기적을 통해 시청각 재료로 사용하고 있는 것 뿐입니다. 하나님께서는 선택된 자들에게 복음을 이해시키기 위해서는 그 무엇이라도 사용하시죠. 심지어 그 분 스스로 이 땅에 내려오셔서 십자가에서 죽으시고 부활을 하시는 장면을 통해서라도요. 복음을 이해하려면 더 크게 눈을 뜨셔야 합니다.
이런 눈으로 보면 오늘 말씀의 시작인 16절의 표현이 이해가 되실 것입니다 ‘점치는 귀신 들린 여종 하나를 만나니 점으로 그 주인들에게 큰 이익을 주는 자라’ 왜 갑자기 귀신 들린 자가 나오고 그 자가 왜 ‘잘살기’에 묶여 있는 사람에게 큰 이익을 주는 자라고 표현이 되고 있는지 이제 이해가 되시죠? 그냥 인본주의에 묶여 있는 자본주의를 가리키는 것입니다. 즉, ‘나’입니다. 더 자세히 말하면 ‘잘살기 위해 돈만 버는 나’입니다.
그런데 이런 ‘귀신들린 자’가 17절 보면, 바울에 대하여 ‘지극히 높은 하나님의 종으로서 구원의 길을 너희에게 전하는 자’라고 소리 질러 외치죠. 귀찮을 정도로 따라 다니면서 외칩니다. 여기서 한가지 우리가 알아야 할 힌트는 ‘사탄은 우리보다 더 하나님을 잘 알고 있다.’는 것입니다. 그 이유는 사탄도 하나님이 복음을 설명하기 위해 사용하는 ‘검은 색’ 도구이기 때문입니다. 이 세상 그 어떤 것도 하나님의 섭리 밖에 존재하는 것은 없습니다.
재미있는 것은 이렇게 귀신들린 여종이 바울로 인하여 귀신과 분리되죠. 그런데 그 뒤로 ‘그 여종이 구원받았다. 혹은 그 여종이 하나님께 찬양을 하게 되었다.’등의 결론은 없습니다. 여종이 귀신과 분리된 후 이야기는 그 여종의 주인으로 시점이 옮겨갑니다. 즉, 이 에피소드에서 성경의 관심은 여종이 아니라 바로 그 여종의 주인입니다. ( 조금 어려운 개념이지만 사실 이 여종과 여종의 주인은 둘 다 ‘나’를 가리킵니다. 즉, 이 둘 다 인본주의 속성을 가리킵니다. )
이렇게 ‘잘살기’에 방해를 받은 그 여종의 주인은 바울과 실라를 고발하죠. 그리고 그들은 옥에 갇힙니다. 이렇게 인본주의는 항상 복음을 핍박하는 것으로 결론이 나죠.
끝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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