사도행전(완료)

행7:17-29(22.06.27.월)

은혜바라기 2022. 6. 27. 08:08

하나님이 아브라함에게 약속하신 때가 가까우매 이스라엘 백성이 애굽에서 번성하여 많아졌더니
요셉을 알지 못하는 새 임금이 애굽 왕위에 오르매
그가 우리 족속에게 교활한 방법을 써서 조상들을 괴롭게 하여 그 어린 아이들을 내버려 살지 못하게 하려 할새
그 때에 모세가 났는데 하나님 보시기에 아름다운지라 그의 아버지의 집에서 석 달 동안 길리더니
버려진 후에 바로의 딸이 그를 데려다가 자기 아들로 기르매
모세가 애굽 사람의 모든 지혜를 배워 그의 말과 하는 일들이 능하더라
나이가 사십이 되매 그 형제 이스라엘 자손을 돌볼 생각이 나더니
한 사람이 원통한 일 당함을 보고 보호하여 압제 받는 자를 위하여 원수를 갚아 애굽 사람을 쳐 죽이니라
그는 그의 형제들이 하나님께서 자기의 손을 통하여 구원해 주시는 것을 깨달으리라고 생각하였으나 그들이 깨닫지 못하였더라
이튿날 이스라엘 사람끼리 싸울 때에 모세가 와서 화해시키려 하여 이르되 너희는 형제인데 어찌 서로 해치느냐 하니
그 동무를 해치는 사람이 모세를 밀어뜨려 이르되 누가 너를 관리와 재판장으로 우리 위에 세웠느냐
네가 어제는 애굽 사람을 죽임과 같이 또 나를 죽이려느냐 하니
모세가 이 말 때문에 도주하여 미디안 땅에서 나그네 되어 거기서 아들 둘을 낳으니라


 왜 하나님께서는 아브라함을 가나안으로 보내신 후 다시 애굽으로 들어가 종살이를 하게 하시고 모세로 하여금 출애굽하여 다시 가나안으로 들어오는 계획을 세우셨을까요? 이것은 선택된 자들이 이 땅에서 ‘인생’이라는 종살이를 한 후 다시 하나님이 계신 곳으로 돌아오는 것을 가리키는 것입니다. 결국 인생은 인생 자체가  목적이 아닙니다. 인생이란, 그 곳에서 우리가 얼마나 예수님이 필요한 존재인가를 알게 하는 도구일 뿐이죠. 오늘은 출애굽과 모세에 대한 묵상을 합니다. 

 18, 19절 요셉을 알지 못하는 새 임금이 이스라엘 사람들을 괴롭힌다는 장면이 나옵니다. 하나님의 은혜가 끊어지면 선택받은 자들은 매우 괴로운 삶을 살게 된다는 것을 의미합니다. 그러나 이런 상황도 하나님의 계획하심 속에 들어 있는 과정이라는 것을 알아야 합니다. 이런 과정이 인본주의에서 분리되는 과정이라는 것을 알아야 합니다. 

 20절 드디어 모세가 나오죠. 모세는 완벽한 예수님의 표지판입니다. 하나님이 그를 보시기에 '아름다운지라’고 하셨죠. ‘잘 생겼다’는 말이 아닙니다. ‘모세를 예수님의 표지판으로 쓰시기에 좋구나~~~’라는 뜻입니다. 사실 사람의 얼굴을 보고 ‘잘 생겼다.’고 느끼는 기준은 애매합니다. 나름 기준은 있겠지만 그 기준이 사람마다 시대마다 다 다릅니다. 이 말은 곧 실체가 없다는 말입니다. 그 나마 얼굴 균형이 잘 맞는 것을 잘 생겼다고 생각할 수는 있겠죠. 이렇듯 하나님께서는 그 기준이 오직 ‘예수님’입니다. 그래서 예수님의 표지판으로 쓰기에 좋을 수록  ‘아름답다.’고 하시는 것입니다. 

 창세기에서 하나님께서 1-6일 동안 창조하시면서 매일의 끝에 보면 '보시기에 좋았더라'는 말씀을 반복하시죠. 그 말씀의 본질은 '예수님을 설명하기에 좋았더라'입니다. 

 
 20절 하반절에 보면 모세가 ‘아버지의 집에서 석(3) 달 동안 길리더니’라고 되어 있죠. 이 말이 가리키는 것은 ‘예수님께서 성부 하나님과 같이 하늘(3)에 있다가’라는 뜻입니다. 3은 성부,성자,성령 삼위 하나님의 숫자입니다. 하늘의 숫자, 복음의 숫자죠. 

 21절 모세가 ‘버려진 후에 바로의 딸이 그를 데려다가 자기 아들로 기르매’라고 되어 있죠. ‘예수님께서 하늘의 지위를 버리시고 이 땅에 내려와서(버려져서) 죄인의 자식으로 태어나신 것’을 의미합니다. 

 22절 ‘ 모세가 애굽사람의 모든 지혜를 배워 그의 말과 하는 일들이 능하더라’라고 되어 있죠. 이 부분이 조금 어렵습니다. 이 부분이 바로 ‘율법’입니다. 구약이라고도 할 수 있죠. 예수님은 2천년 전에 오신 것이 아닙니다. 예수님의 정체성은 정확하게 ‘하나님의 은혜’입니다. 그리고 예수님은 전 인류의 모든 시간에 언제나 ‘동시동존’ 하시죠. 즉, 구약의 율법 속에도 이미 예수님의 존재가 있으시죠. 그런데 구약의 율법으로는 죄인을 구원하는데 실패하게 됩니다. 이 구약의 율법으로는 ‘내가 죄인이구나~~’를 깨닫게 하는 것이 목적이죠. 

 그래서 29절에 보면, 모세가 동족을 죽인 죄인이 되어 도주하는 모습이 나옵니다. 이것은 율법의 실패입니다. 그런데 그 실패는 복음을 알게하는 도구가 되죠. 즉, 율법은 그것을 통해 내가 죄인인 것을 깨닫은 것이 목적입니다. 

 

 그런데 이것은 과연 예수님의 어떤 속성을 가리키는 것일까요? 사실 구약의 시대에서 예수님께서 선택된 자들을 전부 품에 안고 있었던 것입니다. 그런데 그것은 구약의 시대 뿐 만이 아닙니다. 지금 현대의 시대에서도 예수님께서는 복음을 아직 알지 못한 자들을 품에 안고 계십니다. 물론 선택된 자들에 국한합니다. 

 예를 들어 보죠. 어떤 사람이 60살이 되어서 복음을 알게 되었다고 할 때 그 사람은 60살 부터 예수님의 품에 살게 되는 것이 아닙니다. 그 사람은 태어나서 부터, 심지어 태어나기 전부터 예수님의 품에 계속 살던 것이라는 말입니다. 오늘의 말씀은 이 자들이 이 땅에 태어나서 애굽(인생)의 왕자가 되고 스스로 모든 지혜를 배우고 능통해도 결국 ‘죄인’이 될 수 밖에 없다는 것을 가르치고 있는 것입니다. 

 25-28절에 보면, 이스라엘 사람들이 모세를 겁박하는 모습이 나오죠. 이 부분이 바로 ‘율법’으로 구원을 이루려고 하면 반듯이 발생할 수 밖에 없는 ‘갈등’을 표현한 부분입니다. 즉, 율법 중에 ‘안식일을 거룩하게 지키라’는 계명을 생각해 보세요. 이것을 지키는 것이 우리에게 구원을 가져다 줄 것이라고 생각하죠. 그래서 심지어 유대인들은 안식일에 하면 안 되는 39가지를 법으로 정해 놓고 지키죠. 또한 그 39가지 하나 하나를 다시 수 십 가지로 가지쳐서 만들어 지켜 냅니다. 이런 모든 것은 결국 마음의 갈등만 생기게 되죠. 이렇게 율법과 행위 그리고 구원 사이에 생기는 갈등과 모순을 표현한 것이 바로 25-28절입니다. 

 

 하지만 이 과정은 반듯이 필요하죠. 즉, 십계명의 본질을 지키려는 노력은 반듯이 필요합니다. 그런데 그 이유가 우리는 십계명을 단, 1도 지킬 수가 없다는 것을 스스로 증명하는데 있습니다. 그래서 오직 예수님만 소망하는 것으로 방향성을 돌이키게 되는 것입니다. 이것을 회개라고 합니다. 

 

 도둑질 하던 사람이 도둑질을 끊고 교회에 등록해서 기부를 많이 하는 사람으로 변하는 것은 회개가 아니라 '반성'일 뿐입니다.  반성은 내가 변할 수 있다는 것을 전재로 하지만 회개는 내가 '도둑놈'에서 벗어 날 수가 없다는 것을 깨닫고 절망하고 애통하는 지경까지 내려가는 것을 뜻합니다. 그래서 나를 버리고 오직 예수님만 소망하는 것을 말하죠. 반성과 회개는 전혀 다른 것입니다. 이런 반성은 구원과 상관없이 이 세상 모든 종교, 심지어 초등학교에서도 많이 볼 수 있습니다.

 마지막 29절,  결국 교회는 이 세상에서의 신분이 ‘나그네’일 뿐이라는 것이 29절의 표현입니다. 아들 둘을 낳는다는 표현에서 2는 증거의 숫자이므로 ‘나그네의 삶을 확증’하는 것입니다. 

 

'사도행전(완료)' 카테고리의 다른 글

행7:38-43(22.06.29.수)  (0) 2022.06.29
행7:30-37(22.06.28.화)  (0) 2022.06.28
행7:6-8(22.06.23.목)  (0) 2022.06.23
행7:4-5(22.06.22.수)  (0) 2022.06.22
행7:1-3(22.06.21.화)  (0) 2022.06.21