온 섬 가운데로 지나서 바보에 이르러 바예수라 하는 유대인 거짓 선지자인 마술사를 만나니
그가 총독 서기오 바울과 함께 있으니 서기오 바울은 지혜 있는 사람이라 바나바와 사울을 불러 하나님의 말씀을 듣고자 하더라
이 마술사 엘루마는 (이 이름을 번역하면 마술사라) 그들을 대적하여 총독으로 믿지 못하게 힘쓰니
바울이라고 하는 사울이 성령이 충만하여 그를 주목하고
이르되 모든 거짓과 악행이 가득한 자요 마귀의 자식이요 모든 의의 원수여 주의 바른 길을 굽게 하기를 그치지 아니하겠느냐
보라 이제 주의 손이 네 위에 있으니 네가 맹인이 되어 얼마 동안 해를 보지 못하리라 하니 즉시 안개와 어둠이 그를 덮어 인도할 사람을 두루 구하는지라
이에 총독이 그렇게 된 것을 보고 믿으며 주의 가르치심을 놀랍게 여기니라
‘바예수’라는 뜻은 ‘예수의 아들’이라는 뜻입니다. ‘예수’라는 뜻이 ‘구원자’의 뜻이므로 구원자의 아들이라는 뜻이죠. 즉, 구원자는 아닌데 그와 비슷한 위치에 있는 것처럼 꾸미는 자라는 뉘앙스를 성령께서 표현하시고 있는 것입니다. 천주교의 성모 마리아와 비슷한 개념으로 보셔도 됩니다.
이렇게 교회에서 예수님과 비슷한 위치에서 영향력을 행사하는 사람을 ‘거짓 선지자’ 혹은 ‘마술사’라고 표현되어 있습니다. 사람을 현혹시킨다는 의미입니다. 오직 구원은 ‘예수님’ 한 분뿐임을 잊지 말아야 합니다.
이 바예수라는 인물은 오랜 시간 총독 서기오 바울을 현혹하고 있었죠. 그런데 성경은 이 총독 서기오 바울을 ‘지혜 있는 사람’이라고 표현하고 있습니다. 성경에서 말하는 지혜는 ‘복음을 잘 알아듣는 것’을 뜻합니다.
‘지혜’하면 떠 오르는 인물이 바로 솔로몬이죠. 솔로몬은 명백한 예수님의 표지판입니다. 하나님께서는 그리스도 예수께서 다윗의 자손으로 올 것이라는 예언을 하셨죠. 그 때문에 예수님의 표지판인 솔로몬은 다윗의 그다음 왕위를 잇는 아들로 태어났습니다. 솔로몬이라는 이름도 평강(샬롬)이라는 뜻이죠. 아시다시피 평강의 왕은 바로 예수님이죠. 이렇게 솔로몬은 예수님의 두 가지 표지판 역할을 지니고 태어난 자입니다.
왕상3장에서 솔로몬은 하나님께 지혜를 선물 받습니다. 그런데 이 에피소드의 첫머리인 왕상3장1절이 어떻게 시작되는지 아십니까? “솔로몬이 애굽의 왕 바로와 더불어 혼인 관계를 맺어 그의 딸을 맞이하고” 로 시작합니다. 정치적인 힘이 필요해서 이방신을 섬기는 큰 나라의 딸과 간음적인 사건이 벌어진 것입니다. 엄청난 모순이죠? 성경은 인간의 눈으로 읽다 보면 모순 투성이입니다.
더 기가 막힌 장면이 나옵니다. 율법에서 벗어나 있는 산당이라는 장소에서 솔로몬이 일천번제를 드린 것입니다. 그런데 여호와 하나님께서는 그의 꿈에 나타나셔서 “내가 네게 무엇을 줄꼬. 너는 구하라”고 말씀하십니다. 성경은 인간의 인과율을 철저히 무시합니다. 여기서 인간들은 ‘일천번제를 드려서 하나님이 감동하셨다.’의 인과율을 끄집어내죠. 그런데 성경은 그런 일천번제를 드린 장소를 율법에서 벗어난 ‘산당’이라는 장소로 특정합니다. 모순으로 이야기를 비틀어 버린 것입니다. 즉, 우리가 어리석을 초점에 휘둘리지 않도록 배려하고 계신 것입니다. 그래서 이 이야기는 ‘일천번제의 행위’에 대한 댓가가 초점이 아닙니다.
이 이야기의 초점은 정확하게 9절-10절입니다.
“왕상9-10 누가 주의 이 많은 백성을 재판할 수 있사오리이까 듣는 마음을 종에게 주사 주의 백성을 재판하여 선악을 분별하게 하옵소서. 솔로몬이 이것을 구하매 그 말씀이 주의 마음에 든지라 ”
이 말씀을 더 요약하면 바로 ‘듣는 마음’입니다. 이 듣는 마음이 바로 복음의 가장 큰 속성 중에 하나이며 이것을 끌어내기 위해 하나님은 이 에피소드를 전개하고 계시는 것입니다. 이 ‘듣는 마음’으로 결국 선악 간의 분별을 할 수 있게 해 달라고 9절에 나오죠. 그리고 10절에 보면, 솔로몬의 그 말이 ‘주의 마음에 든지라’라고 나옵니다. 이렇게 ‘주의 마음에 든지라’는 뜻은 바로 ‘이것이 복음을 설명하는 것에 사용할 수 있겠다.’는 하나님의 뜻입니다. 이것이 바로 이 에피소드의 초점입니다.
솔로몬은 ‘듣는 마음’을 달라고 했는데 11절하에서 보면, 하나님은 ‘네가 지혜를 구하였으니’라고 받으시죠. ‘듣는 마음’을 '지혜'로 판단하신 것입니다. 이렇게 듣는 마음, 곧 지혜를 받아서 선악 간의 심판을 하시는 분이 누구실까요? 바로 예수님입니다. 즉, 이 에피소드는 하나님께서 솔로몬을 통해서 지금 예수님을 소개하고 있는 장면입니다. 그래서 솔로몬에 집중하는 것을 예방하기 위해 그가 이방 나라의 이방 여자와 간음하는 행위, 산당에서 제사드리는 행위를 이 에피소드 초반에 갖다가 붙여 놓으신 것이죠. 즉, 솔로몬은 죄인입니다. 그러나 그를 도구로 예수님과 복음, 그리고 지혜를 설명하고 계시는 것이죠.
이 에피소드 다음에 바로 연결된 에피소드가 무엇인지 아시나요? 그 유명한 아이를 가지고 싸우는 두 창녀의 이야기입니다. 다 알다시피 솔로몬이 칼로 자르라고 명령해서 진짜 엄마를 찾는 에피소드입니다. 하나님께서 말하는 이 에피소드의 진짜 초점이 무엇일까요?
일단 가짜 초점은 솔로몬의 잔머리입니다. ‘칼로 자르라고 했으니 아마 진짜 엄마는 그러지 못할 것이다.’라는 잔머리로 사건을 해결한 것이죠. 복음을 보지 못하는 사람들은 여기에 머물러서 '솔로몬의 지혜가 역시 휼륭하구나~~~ '로 끝나죠.
그러나 이 에피소드의 초점은 생명은 지혜(예수님)로 인하여 참 주인을 다시 찾게 된다는 것입니다.
그리고 숨겨진 초점이 하나 더 있습니다. 그것은 지혜란 바로 ‘듣는 마음’이라는 것입니다. 당시 이스라엘은 초 부흥기였습니다. 솔로몬은 제국의 황제격이였죠. 그런 솔로몬은 높은 신분의 신하들 조차 함부로 볼 수 없는 왕이었습니다. 그런데 천하디 천한 창녀가 그런 왕 앞까지 올 수 있었을까요? 그러고 그런 왕이 창녀들의 이야기를 끝까지 경청할까요? 하지만 그런 일이 벌어졌죠. 즉, 가장 높은 신분의 사람이 가장 낮은 신분의 사람의 이야기를 듣게 됩니다. 즉, 솔로몬은 하나님께 지혜를 받게 되자 '듣는 것' 을 매우 잘하게 된 사람이 된 것입니다.
이것이 바로 이 에피소드의 진짜 핵심입니다. 지혜는 '잘 듣는 것'입니다. 그렇다면 무엇을 잘들어야 할까요? 바로 복음입니다. 복음은 하나님의 구원 계획이죠. 그리고 그 복음의 주인공은 예수님입니다. 그래서 지혜로운 사람이란 바로 복음을 잘 듣고 예수님을 믿게 된 자를 말합니다.
다시 사도행전으로 갑니다. 그래서 이 총독 서기오 바울을 지혜 있는 사람이라고 표현한 이후 그가 ‘바나바와 사울을 불러 하나님의 말씀을 듣고자 하더라’라는 구절이 붙어 있는 것입니다. 이제 이 부분이 잘 이해가 되시죠?
이 때 바예수는 총독이 복음을 믿지 못하도록 힘쓰죠. 이때 사도 바울이 이 바예수를 ‘모든 거짓과 악행이 가득한 자요 마귀의 자식이요 모든 의의 원수여 주의 바른 길을 굽게 하는 자’라고 합니다. 이것은 교회에서 예수님의 위치에 비슷하게 올라 와 있는 것들에 대한 정의입니다. 잘 기억하세요. 가장 바예수가 많은 곳이 바로 교회입니다. 예수님을 대신하거나 예수님의 위치에서 나의 눈을 가리는 모든 것을 경계하셔야 합니다. 교회는 인간의 영향력이 줄어야 하는 곳입니다.
이후 바울의 기도로 바예수는 ‘보지 못하는 자’가 됩니다. 즉, 복음을 절대 보지 못하는 자, 절대 듣지 못하는 자를 가리키는 것입니다.
끝